문화·스포츠 문화

[썸타는 영화&경제] (32) ‘채식주의자’와 넛지효과



#‘몽고반점’이라는 한마디에…


그저 툭 하고 한마디 던졌을 뿐이다. “영혜(채민서)는 몽고반점이 스무살까지 있었는데, 그때 있었으니 지금도 있을걸….”

영화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언니 인혜(김여진)가 아들을 목욕시키면서 아이 엉덩이에 몽고반점 얘기를 남편 민호(현성)와 나누다 무심코 던진 말이다. 이 한마디로 민호는 와르르 무너진다. 이후 처제인 영혜의 엉덩이를 떠올리며 잠자리를 갖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 때문에 민호는 걷잡을 수 없이 파탄의 길로 빠져들고 만다.

영혜(오른쪽)는 꿈에 나타난 흉측한 얼굴을 본 뒤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된다. /출처=네이버영화영혜(오른쪽)는 꿈에 나타난 흉측한 얼굴을 본 뒤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된다. /출처=네이버영화




#남편을 거부하는 영혜

맨부커상 수상작인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 3부작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채식주의자로 돌변한 영혜와 그 선택으로 인한 갈등이 큰 줄기를 이룬다. 영혜는 어느날 꿈에서 본 얼굴 때문에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된다. 그 얼굴은 피투성이일 때도 있고, 썩어 문드러진 시체 같기도 했다. 이후 영혜는 집안에 고기란 고기는 모조리 내다버린다. 계란 프라이라도 해달라 보채는 남편에게는 “냉장고에 그런 것 못 두겠어. 참을 수가 없어”라며 진저리를 친다. 남편과의 잠자리까지 거부한다. “뭐가 문제냐”는 남편의 물음에 영혜는 “냄새가 나서 그래. 당신 몸에서 고기 냄새가 나”라고 답하면서.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를 주변에서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특히 영혜의 아버지는 매우 폭력적이다. 가족 식사모임에서 아버지는 “한번 먹기 시작하면 다시 먹을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며 고기를 강제로 영혜의 입에 밀어 넣고, 거부하는 딸을 때리기까지 한다. 여기에 저항해 영혜는 칼로 제 손목을 긋는다. 그 이후로는 영혜와 그녀를 둘러싼 일체의 상황이 아주 고약하면서 비극적인 방향으로 치달아간다.

영혜는 식물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점점 깊이 빠져든다. /출처=네이버영화영혜는 식물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점점 깊이 빠져든다. /출처=네이버영화


#선택을 유도하는 ‘넛지’


행동경제학에 ‘넛지(nudge)’라는 말이 있다. 작은 언행 하나가 커다란 변화를 유발했을 때 흔히 쓰인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민호가 처제의 몸을 탐하도록 만든 ‘몽고반점’이란 말이나 영혜를 채식주의자로 이끈 ‘꿈속의 얼굴’도 넛지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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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꿈치로 슬쩍 찌르다’ ‘주위를 환기시키다’는 뜻의 넛지라는 말은 리처드 세일러와 캐스 선스타인이 쓴 ‘넛지: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이라는 책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세일러와 선스타인은 넛지를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신봉하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의 실천이론으로 넛지를 앞세웠다. 잘 설계된 넛지 하나가 마치 옆구리를 쿡 찌르듯 각성작용을 해서 기대했던 바람직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비디오카메라를 본 인혜가 남편의 혐오스러운 배신에 치를 떨고있다.  /출처=네이버영화비디오카메라를 본 인혜가 남편의 혐오스러운 배신에 치를 떨고있다. /출처=네이버영화


#채식도 넛지의 결과인가?

넛지의 대표적인 사례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공항의 소변기’다. 공항 관리자는 남성 화장실의 청결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소변기에 파리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밖으로 새는 소변량이 80%나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소변을 보는 남성들이 ‘조준 사격’을 하는 재미로 파리를 겨냥한 덕분이다. 이외에도 학교 구내식당에서 메뉴에 변화를 주지 않은 상태에서 음식의 배열만 바꿈으로써 학생들의 음식 선택에 변화를 주는 것, 과일을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놓음으로써 예상 가능한 선택을 유도하는 것 등을 넛지의 일례로 볼 수 있다.

넛지에도 원칙이 있다. 첫째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을 금지하지 않고, 둘째 그들의 경제적 인센티브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고, 셋째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그들의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3박자를 갖춰야만 넛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의 민호나 영혜의 행동 변화는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넛지에 완전히 부합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래도 사람의 사소한 말이나 행동이 엄청나게 큰 변화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는 점에서는 넛지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영혜(왼쪽)은 일체의 식사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으로 향해간다.   /출처=네이버영화영혜(왼쪽)은 일체의 식사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으로 향해간다. /출처=네이버영화


#별뜻없는 언행 때문에…

‘채식주의자’라는 작품을 보고 나면 누군가의 별뜻없는 사소한 말과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뜻밖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그런 일들은 미리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예방도 통제도 불가능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란 예기치 못한 폭력과 욕망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허약한 존재에 불과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 말이다. 작가인 한강도 “작품을 쓰는 동안 인간의 폭력성과 욕망에 대한 내 끝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완성하려고 했으며, 가능한 한 그 질문 속에 있으려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영화 ‘채식주의자’에서 인혜가 끔찍했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수없이 ‘만약에~’를 되뇌면서 넋두리했을까? “이건 어쩜 꿈인지도 몰라.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지만 깨고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걸 알게 되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꿈에서 깨면, 그땐…”이라고. /문성진기자 hnsj@sed.co.kr

문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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