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7.4남북공동성명 44주년...무엇이 나아졌나



1972년7월4일 오전 10시, 서울 중앙정보부 기자회견장. 이후락 중정부장이 내외신 기자 107명 앞에서 입을 열었다. “실은 제가 지난 5월 박정희 대통령의 뜻으로 평양에 갔다 왔습니다.” 이어지는 이 부장의 발표. “남과 북이 상호 극비 방문해 의견을 조율한 결과 7개 항에 합의했습니다. 북한도 지금 같은 내용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남북한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발표한 공동성명의 골자는 자주·평화 통일. 남북조절위원회를 설치하고 적십자회담의 성사를 위해 협조하며 서울-평양 간 직통전화를 가설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

전국은 감동과 흥분에 젖었다. 통일의 희망도 피어났다. 신문마다 호외를 발행하며 ‘통일은 오는가’, ‘산천도, 초목도 울었다’ 등의 제목을 달았다. 함흥 태생의 여류 소설가 박순녀(朴順女)는 신문 기고를 통해 ‘왜 우리는 여지껏 통일이라는 말을 성큼 입 밖에 내지 못했었나?’라고 반문하며 고향에 가야 한다는 ‘신념이 생긴다’라는 글을 썼다. 거리의 시민들은 ‘해방 이후 가장 기쁜 일’, ‘후련하고 가슴 뜨거운 뉴스’라며 반겼다.


해외 반응도 마찬가지. 환영 일색이었다. 프랑스 국제 방송은 ‘닉슨 대통령이 북경에서 이룬 것 같이 국제관계에 새로운 정의를 내리는 것’이라며 ‘우주인이 달나라에 거대한 제 1보를 내디딘 것에 비유될 만큼 통한(統韓)을 위한 거대한 제 1보’라고 극찬했다. 마침 ‘할슈타인 원칙’을 공식 포기해가며 동독과 관계 개선에 나섰던 서독에서는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전쟁이 진행 중이던 베트남은 부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 7·4 남북공동성명을 반기지 않았던 나라는 딱 하나, 대만 뿐이었다. ‘우려된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경제계도 기대가 컸다. 두 가지 측면에서다. 멀게 보면 남북 경협으로 물류 산업이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당장 급한 것은 경제난 탈출. 7·4 공동성명이 불경기 해소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당시 경제가 얼마나 안 좋았는지는 지표가 말해준다. 연간 경제성장률이 1970년 7.6%. 1971년 8.6%, 1972년은 5.1% 수준을 맴돌았다. 요즘 기준으로는 고성장이지만 1969년의 15.9%와 비교하면 극심한 침체였다.

문제는 침체가 구조적이었다는 점이다. 1969년에는 기록적인 성장률을 올렸지만 이때부터 ‘외자도입=성장’이라는 등식이 깨지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1969년 차관기업(정부가 들여온 차관을 투입한 대기업) 83개 가운데 45%가 부실로 드러났다. 1971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차관기업의 부실’을 문제 삼아 신규 차관 제공을 취소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차관 도입에 따른 원리금 상환부담(경상 외환수입 총액 대비)도 1966년 2.2%에서 1968년 10.1%, 1969년 14.1%, 1970년 19.0%, 1971년 19.8%로 늘어났다.

세금도 안 걷혀 진도율이 극히 부진하고 도·소매 물가가 치솟았다. 태완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이끄는 경제팀은 출범 6개월이 지나도록 도대체 뭣 했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당시 경제가 지금보다 나았던 것은 오직 하나. 환율 뿐이었다.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390원대로 지금보다 원화가치가 3배 가량 높았다.*** 경제계는 앞이 안 보이는 침체 국면이 남북대화로 인해 뭔가 전기를 맞이할 것이라는 기대를 걸었다.

정부 부처들도 7·4 남북 공동성명의 영향을 받았다. 문공부는 각 부처 공보관들에게 ‘북괴 대신 북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김일성과 그 체제 비방을 삼가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야당인 신민당 소속이었으나 ‘반공 투사’로 유명했던 이철승 의원은 ‘반공 일변도인 교과서부터 고쳐야 한다’고 주장해 이목을 끌었다. 북한과 제대로 경쟁하려면 한국 사회의 우월성을 드러내야 하고 각종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남식(金南植)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우리의 사회제도와 정치체제가 북의 그 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충분히 과시할 수 있도록 사회복지에 심혈을 기울이고 국민 생활을 개선시키기 위한 사회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모두가 축하하는 분위기 속에서 누가 남북대화와 공동성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나를 놓고 미묘한 알력도 일어났다. 한국 내에서는 중앙정보부장과 국무총리의 이견이 심하고 공을 다툰다는 주한 미 대사관의 정보보고가 국무부로 올라갔다. 쿠르트 발트하임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은 자신이 주선해 남북간 비밀협상이 오스트리아 수도 비인에서 진행됐다는 비화를 공개하기도 했다.****

진실은 무엇일까. 과연 UN이 역할을 했을까. 비밀이 해제된 미국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가장 큰 동력은 ‘작은 데탕트(긴장 완화)’를 추구했던 미국 닉슨 행정부의 압력. 박정희 정부는 남북 화해 분위기를 원치 않았으나 미국의 종용으로 마지못해 나섰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공 간 화해와 서독의 신동방정책 등 국제적인 큰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강요된 남북 대화는 얼마 안 지나 한계를 드러냈다.

7·4· 남북 공동성명의 전후를 살펴보면 한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격동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4월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94만여 표차로 간신히 이겼다. 5월 총선에서는 ‘총통제 개헌 방지를 위한 저지선(69석) 확보’를 호소했던 신민당이 89석을 차지했다. 서울 지역 19개 선거구에서는 18개를 신민당이 장악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위축된 가운데 대형 사건이 줄줄이 꼬리를 물었다.

남북 공동성명(7월4일)이 나온지 한 달이 안 지난 8월3일에는 자본주의의 기본인 이자 수수까지 부정하는 초법적 ‘8.3 사채 동결 조치’가 발동됐다. 결정판은 10월17일 비상계엄령 발동과 함께 발표된 ‘유신 헌법’. 대통령에게 권력을 몰아준 10월 유신의 이유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통일을 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강변했다. 북한의 권력은 영구한데, 우리 쪽은 선거로 인해 대통령은 물론 국회 권력까지 바뀔 수 있어 남북 대화와 통일을 위해 유신헌법 개정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본인도 10월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통일’이란 단어를 18회 사용했다. 이런 말도 했다. “그러나 만약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안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 것을 남북대화를 원하지 않은다는 국민의 의사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 유신 없이는 남북 대화도 없으며 통일을 그토록 원한다면 이를 받아들이라는 논리다.

정권 강화와 연장을 위해 통일을 이용한 것은 남쪽 뿐 아니다. 북한 김일성도 같은 해 12월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면서 권력을 보다 공고히 다졌다. 수상제가 주석제로 바뀌고 김정일의 후계 구도가 보다 노골적으로 진행된 것도 이 때부터다. 남북한의 권력자들은 7·4 공동성명을 독재권력 강화로 가는 디딤돌로 악용했던 셈이다.


7·4 공동성명 발표 44주년. 어린 날의 감격이 아직 생생하건만 고향에 곧 돌아갈 수 있다며 눈물 흘리던 실향민들은 세상을 떠났다. 통한(統韓)의 꿈을 안고 통한(痛恨)의 세월을 겪어온 실향민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남북공동성명 성명 발표 당시 부럽다는 반응을 보였던 독일과 베트남은 통일된 지 오래다. 유일하게 ‘우려된다’고 반응했던 대만도 중국과의 본격적인 교류확대에 나서고 있다. 한반도만 예외다. 오히려 나빠졌다. 이산가족 상봉도 끊기고 남북교역도 줄어들었다. 개성공단도 폐쇄되고 말았다. 민족과 세월에 걸린 속박이 참으로 야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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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기자회견장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나흘간 북한을 다녀왔다고 밝혔다. 북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해 회담을 가진 사실도 공개했다. 분단 4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만난 남북한의 밀사들은 문구 협의를 거쳐 7개 항에 합의했다. 아래는 그 전문.

최근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관계를 개선하며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회담이 있었다.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일부터 5월 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으며, 김영주 부장을 대신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1972년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다. 이 회담들에서 쌍방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하루빨리 가져와야 한다는 공통된 염원을 안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쌍방은 오랫동안 서로 만나보지 못한 결과로 생긴 남북 사이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긴장의 고조를 완화시키며 나아가서 조국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완전한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1.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 통일 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 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2. 쌍방은 남북 사이의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서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 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

3. 쌍방은 끊어졌던 민족적 연계를 회복하여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자주적 평화 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남북 사이에 다방면적인 제반 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4. 쌍방은 지금 온민족의 거대한 기대 속에 진행되고 있는 남북적십자회담이 하루빨리 성사되도록 적극 협조하는 데 합의하였다.

5. 쌍방은 돌발적 군사 사고를 방지하고 남북 사이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직접 신속 정확히 처리하기 위하여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 전화를 놓기로 합의하였다.

6. 쌍방은 이러한 합의 사항을 추진시킴과 함께 남북 사이의 제반 문제를 개선. 해결하며, 또 합의된 조국 통일 원칙에 기초하여 나라의 통일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키로 합의하였다.

7. 쌍방은 이상의 합의 사항이 조국 통일을 1일 천추로 갈망하는 온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에 부합된다고 확신하면서 이 합의 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엄숙히 약속한다.

** 할슈타인 원칙은 동독과 수교한 나라와는 국교를 맺지 않겠다는 서독의 외교정책. 냉전이 한창 때인 1955년 주창돼 서독이 루마니아와 수교한 1967년부터 부분적으로 사문화하고, 신동방정책을 주창한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에 의해 1969년 공식 폐기됐다. 같은 분단국가여서 그랬는지 7·4남북공동성명에 대한 서독 언론의 관심도 대단히 컸다. 5공 정권 초기 문교부 장관을 지낸 이규호씨가 서독 유학생 시절인 1972년 잡지에 기고문 ‘백림(伯林 ·베를린)에서 바라본 7·4성명’에 따르면 서독 언론은 남북공동성명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반면 동독은 며칠이 지나서야 단신으로 소개하는 정도였다. 당시 서독 언론은 ‘호네커 서기장은 사회주의 형제국인 김일성 수상에게 배우라’는 기사를 내보냈다고 한다. 북한은 7·4 공동성명에 그만큼 적극적이었다. 기밀이 해제된 미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남북대화 전반에 걸쳐 남한은 소극적이고 오히려 북한이 적극적이었다.(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연구논문, ‘7·4남북공동성명의 재해석’,2011). 김 교수의 동 논문에 의하면 미 국무부가 판단한 박정희 정부는 7·4남북 공동성명 발표 자체에도 부정적이었으나 북한의 적극적인 평화 공세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공개하게 됐다. 궁금하다. 당시 박정희 정부의 통일 정책과 정보 공개는 어느 쪽에 가까웠을까. 서독의 빌리 브란트 아니면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 국책연구기관으로 설립 1년 차를 지나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제시한 연말 적정 환율은 396~408원 수준. 그 이전에는 이 보다도 낮았다. 1961년 5.16 쿠테타 당시 환율은 150대 1,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979년 10월26일은 450원이었다. 외환위기를 맞기 직전인 1997년 하반기 원화 환율은 770~800원에서 형성됐다. 통상 경제가 발전하면 통화가치도 따라서 올라가는데 그 반대 현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경제가 발전해도 통화의 가치가 갈수록 떨어지는 세계 유일의 국가다.

**** 남북 대화 초기 발트하임 총장의 역할이 있었어도 나중으로 갈수록 남북 적십자사에 파견된 남과 북의 정보요원들이 실무 협상을 도맡았다. 발트하임 총장은 역대 유엔 사무총장 가운데 임기를 마친 후 고국에서 대통령을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출신인 발트하임은 1972년부터 1981년까지 만 9년간 제 4대 UN 사무총장을 역임한 뒤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오스트리아 대통령을 지냈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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