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이 19m에 달하는 거대한 타원형의 나무 테이블이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5전시실이다. 그 테이블 위에는 띄엄띄엄, 굴려 만든 동그란 찰흙 덩어리가 놓여 있다. 테이블 주변으로 의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 잡았다. 앉아보라는 얘기다. 관객은 안내데스크에 비치된 4가지 색의 찰흙 덩어리를 한 주먹 뜯어와야 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두 손바닥으로 누르고 굴려 찰흙으로 구형(球形)을 만들어 볼 것. 작가 김수자는 “뾰족한 마음의 모서리를 깎듯 찰흙을 굴려 둥글게 만들어 보라”고 권한다. 작품의 규모를 비롯해 알듯 말듯 한 적막감이 관객을 압도하는 이 작품의 제목은 ‘마음의 기하학’. 관람객이 직접 참여해 함께 만드는 작품이다. “관객들이 만들어서 놓고 가는 찰흙 구(球)가 테이블 위에 펼쳐질 것이고 그것이 또다른 회화의 평면으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작가의 설명이 뒤따른다. 서낭당 앞에 소원을 비는 돌탑이 쌓이듯 전시가 끝날 무렵이면 이 테이블 위에 찰흙 공이 수북하게 쌓이리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중진 작가를 선정해 현대자동차의 후원으로 대규모 개인전을 여는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의 세 번 째 작가로 뽑힌 김수자의 전시 ‘마음의 기하학’이 27일 개막해 내년 2월 5일까지 열린다.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김수자는 보따리와 이불보, 소리와 빛 등을 이용한 장소 특정적 설치작품과 퍼포먼스 등을 통해 자신과 사회를 탐구해 왔다. 전시작 9점은 모두 국내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것들이다.
덩그러니 놓인 테이블과 손수 빚어야 할 찰흙덩이 뿐인 전시장인 듯 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클레이볼(찰흙공) 굴러가는 소리와 작가가 가글하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 빈 것 같은 공간을 빛이나 소리 같은 ‘비물질’로 채우는 것은 김수자 작품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평소 도자기와 그릇이 만드는 ‘허(虛)의 공간’에 관심을 가져왔다는 작가는 “작은 점토를 사다가 만져보니 어린 시절 흙장난 이후 잊고 있던 흙과 손과의 만남이 새삼스러웠다”면서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힘과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양극의 힘에 의해 구가 형성된다는 사실, 그 듀얼리티(이중성)와 중력의 문제가 나를 매혹시켰다”고 말했다.
전시장 밖 중정에는 철체를 달걀모양으로 만든 1.5m의 오브제를 가로세로 10m 거울 위에 세워둔 ‘연역적 오브제’가 눈길을 끈다. 햇빛이 거울에 반사돼 두 배는 더 밝은 이 공간에서 이 설치작품은 빛을 감싸는 또다른 의미의 보자기가 된다. 이 외에도 작가가 10년 가까이 직접 사용한 요가매트가 ‘몸의 기하학’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됐다. 현대미술에서 기성품을 작품으로 차용하는 사례는 흔히 있으나 김수자의 경우 “레디메이드 보다는 유즈드”, 즉 사람이 사용했던 손길과 흔적이 남은 사물을 활용한다.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활동하는 김수자는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선정된 것을 비롯해 메트퐁피두센터 개인전,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개인전, 리옹비엔날레와 휘트니비엔날레 참가 등 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