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폭격기, 고층빌딩을 들이받다



1945년 7월28일 오전9시49분, 뉴욕. 시내를 뒤흔드는 굉음이 일더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상층부가 화염에 휩싸였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 사람들은 일본의 공격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원인은 따로 있었다. 미 육군 항공대의 B-25 미첼 쌍발 폭격기. 짙은 안개 때문에 인근 공항 관제탑으로부터 착륙을 권고받았으나 비행을 강행하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79층을 들이받았다.

시속 400㎞ 속도의 12t짜리 폭격기와 세계 최고층 빌딩의 충돌 결과는 사망 14명. 폭격기 조종사 2명과 탑승 병사 1명,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79층과 80층에 입주한 미국 카톨릭복지협회 직원 11명 등이 죽었다. 부상자 30여명이 발생했어도 더 이상의 희생자는 없었다. 빌딩 안에 있던 1,540명은 무사했다. 충격으로 엘리베이터 한 대가 75층에서 지하까지 떨어졌으나 엘리베이터걸 한 명은 기적적으로 다치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2차 피해도 미미했다. 불붙은 엔진 하나가 빌딩 중앙에 위치한 엘리베이터 통로를 타고 지하 2층까지 떨어졌지만 다친 사람이 없었다. 미첼 폭격기 안에 실려 있던 항공유 800갤런이 불이 붙은 채 75층까지 쏟아져 내려와 건물 바깥에서 보기에는 상층부 전체가 불타는 것으로 보였어도 추가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빌딩 안에서 미첼 폭격기의 충돌 순간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바퀴(랜딩 기어)가 내려진 상태였다. 폭격기 조종사가 베테랑이었지만 착륙 지점을 착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세계 최고층 건물(완공된 1931년부터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들어선 1972년까지 이 기록을 유지했다)이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불과 이틀 만에 제 기능을 찾았다. 건물 외벽과 78~80층 내부, 엘리베이터 손상에 따른 피해액은 100만 달러. 미국 정부는 보상금과 피해액을 지급하는 한편 비슷한 유형의 사고에 대비해 1946년 연방불법행위청구권법(FTCA)을 제정했다. 연방정부에 속하는 기관이 잘못을 저지를 경우 시민들의 피해를 보상하는 이 법률의 입법은 적극적인 시민 보호 사례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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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가던 이 사건을 부각시킨 것은 2001년 9·11테러. 세계무역센터 빌딩에서만 2,605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9·11사건이 일어난 뒤 비교 대상으로 떠올랐다. 동일한 항공기 충돌에도 ES빌딩의 피해가 훨씬 작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충돌 강도가 약했다. 폭격기치고는 항공모함에서도 이륙이 가능할 정도로 중량이 가벼운 미첼폭격기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가한 충격은 9·11테러에 비해 20분의 1 수준으로 알려졌다. 두 번째, 화재에 약한 현대식 빌딩의 철골 구조와 달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져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늘어만 가는 초고층빌딩은 항공기 충돌로부터 안전할까.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확률 1만분의 1 이하라고 하니까. 문제는 불의의 사고로부터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세계무역센터를 설계한 건축사무소에 따르면 대형여객기가 충돌해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 시공됐으나 항공기의 적재 항공유로 인한 대형 화재 등 2차 피해는 고려하지 않아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고층건물과 항공기 충돌이 남의 일 같지 않다. 9·11 테러 이후 경비행기가 대형 빌딩에 실수로, 또는 고의적으로 부딪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도 불안하다. 초고층빌딩이 완공된 이후에는 불황이 깊어진다는 ‘마천루의 저주’ 속설도 걱정을 자아낸다. 군용비행장이 인접한 잠실에 무수한 반대를 뚫고 들어서는 초고층 건물이 안전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경제도 폭격기와 충돌을 견뎌낸 빌딩처럼 굳건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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