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기요금제가 종량제인 동시에 6단계의 누진제가 적용돼 사용량이 늘수록 요금은 큰 폭으로 증가해 1단계보다 6단계 사용 요금이 최대 11.7배나 비싸다. 올 기록적인 폭염으로 7~8월 에어컨 사용량이 많았던 가구는 수십만원에 달하는 전기요금 폭탄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누진 단계 축소 등 누진제 완화 찬성 측은 가정용 전기수요가 국가 전체 전력수급에 큰 영향을 주지 않고 현 누진제가 국민 삶의 질 제고에 맞지 않는 구조인 만큼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신중론을 펴는 측은 누진제가 요금할증과 함께 할인도 적용돼 에너지 절약과 공유자원 배분에 합리적인 제도인 점을 들어 이를 유지하면서 미진한 부분만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양측의 견해를 싣는다.
습도와 기온이 모두 높은 싱가포르와 홍콩의 비약적인 발전은 에어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에어컨이 없었으면 미국 남부의 이른바 ‘선벨트(sunbelt)’ 지역의 휴스턴, 댈러스, 애틀랜타, 마이애미, 올랜도, 피닉스, 라스베이거스 등 대도시의 눈부신 성장도 없었을 것이다. 에어컨은 이제 주거와 업무환경을 좌우하는 필수재가 됐다. 우리나라도 이제 에어컨 보급률이 80%를 넘어섰다. 냉방시설이 갖춰진 쾌적한 환경 속에서 여름을 나는 것은 더 이상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없다. 더욱이 올여름처럼 폭염이 기승을 부릴 때 에어컨은 공부하는 학생들, 일하는 직장인들, 그리고 국민들의 건강과 생존까지 지켜주는 필수 설비임이 틀림없다.
최근 전기요금 폭탄 우려가 커지면서 “정부가 폭염 경보를 내려 집밖에는 가급적 나가지 말라고 하면서 에어컨을 조금만 틀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것이냐”는 인터넷 댓글이 생각난다. 유가파동이 한창이고 우리나라 경제개발을 위한 노력이 한창이던 197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전기요금 누진제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은 정부가 국민들의 복지 수준이나 삶의 질에 맞춰 전기요금 구조를 바꾸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몇 주 전 정부가 전기요금을 다소 할인하겠다는 발표를 했지만 이는 근본적인 처방이 되지 않는다. 요금폭탄으로 평소보다 20만~30만원 이상 전기요금이 더 나오게 생겼는데 겨우 2만~3만원 할인한 것은 생색내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전기는 저장이 불가능해 최대 전력수요보다 더 많은 용량의 발전설비를 건설해야 한다. 만약에 최대 전력수요를 조금 줄일 수 있다면 발전소를 안 지어도 되므로 전력공급 비용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 주택용 전기요금에 누진제를 설계했던 이유다. 그러나 지금은 주택용 전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14% 이하로 최대 전력수요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 최대 전력수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히려 낮 시간에 사용이 급증하는 일반용과 수요의 55%를 넘는 산업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누진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누진 단계가 6단계이며 누진율은 무려 11.7배에 달한다. 정부와 국책연구원이 지난 1999년부터 누진제 완전 폐지나 단순화를 검토해왔던 것은 이와 같은 우리나라 전기요금 누진제의 문제점과 이의 개선 필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진제는 여러 이유로 미뤄져 왔다. 김대중 정부 때는 서민 부담이 증가될 수 있었다는 이유로, 노무현 정부 때는 고유가로, 이명박 정부 때는 전력수급이 불안해서라는 이유로 번번이 제도개선이 무산됐다. 그러나 현시점은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를 완화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시기라고 판단된다.
그 첫째 이유는 전력수급에 큰 문제가 없는 점이다. 다른 해보다 유난히 더운 여름이지만 올해는 다행스럽게도 전력의 공급은 예비율 수준이 8% 안팎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향후 추가적으로 완공될 석탄 및 원자력 발전설비를 고려한다면 향후 몇 년간 전력공급은 안정적으로 지속될 것으로 보여 올해 누진제를 완화하더라도 전력수급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둘째는 국제적으로 저유가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누진제를 완화하게 되면 단기적으로 한국전력의 수익성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올해는 저유가와 낮은 연료비, 그리고 앞서 지적한 비교적 충분한 발전설비 덕으로 전기 도매가격(SMP)이 기록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그 결과 한전이 사들이는 구입전력 비용이 높지 않고 게다가 기록적인 폭염으로 오히려 한전의 영업이익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싸게 사서 더 많이 비싸게 파니 한전의 수익성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한전이 다소 숨을 돌릴 수 있는 지금이 누진제 완화의 적기다.
제도를 바꾸게 되면 좋아지는 점도 있지만 나빠지는 점도 있게 마련이다. 누진제 완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부작용만 고려하게 된다면 제도개선은 이루어질 수 없다. 지금 국민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전기요금 수준이 아니다. 잘못된 전기요금 구조인 것이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요금폭탄 문제를 구조적으로 먼저 개선하는 것이 선결과제다. 요금 수준을 변경할 필요성이 있다면 나중에 또 변경하면 될 일이다.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다 해결하려 한다면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문제는 이번에도 물 건너가게 된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조성봉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