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중남미의 거대국가, 그란 콜롬비아 탄생





‘북으로는 미시시피 강에서 남으로는 혼 곶(남미대륙 남단)까지.’ 18세기 후반 남미 해방의 선구자인 프란시스코 미란다가 제시했던 목표다. 지금의 미국 중남부에서 칠레까지 광활한 대륙에 통일 주권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포부는 구상에 머물지 않았다. 남미대륙 전체는 아니지만 19세기 초 중남미 일대에 거대한 국가가 들어섰다. 그란 콜롬비아(Gran Columbia).


1821년 9월7일, 누에보 그라나다(뉴 그라나다)의 해안도시 쿠쿠타. 백인 지주들로 구성된 의회가 만장일치로 공화국 성립을 선포하고 스페인 제국과 싸워 온 독립 운동가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당시 38세)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오늘날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에콰도르·파나마 등 4개국의 뿌리인 콜롬비아가 탄생한 순간이다. 면적 217만㎢로 한반도 전체보다 9.7배 컸다.

나라 이름은 콜롬비아. 훗날(1963년부터) 사람들은 국명 앞에 ‘크다, 위대하다(大·Great)’라는 뜻의 그란(Gran)을 붙였다. 작아진 콜롬비아와 구분하기 위해서다. 오늘날 콜롬비아는 분열 끝에 작아졌으나 그란 콜롬비아의 영토는 멕시코를 제외한 중미 전체였다. 베네수엘라 지역에서 태어나 키토(에콰도르)와 누에보 그라나다(콜롬비아)를 해방한 볼리바르와 그 지지자들이 1819년 12월 세운 문서 상의 국가이던 콜롬비아 공화국은 쿠쿠타회의를 통해 실질적인 거대국가로 태어났다.

독립군을 이끄는 미란다의 부관으로 시작해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마침내 독립과 건국의 뜻을 이룬 볼리바르 대통령의 야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종신직 대통령뿐 아니라 ‘해방자(Liberator)’로 지명돼 후계자를 지명할 수 있고 의회의 동의 없이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독재 권력을 얻게 된 그는 남미 대륙 전체의 해방을 위해 페루로 진군해나갔다. 페루에서 남미독립의 또 다른 영웅 산 마르틴과의 협력으로 페루도 그란 콜롬비아의 일원으로 들어왔다.

전성기인 1825년 그란 콜롬비아의 강역은 요즘의 브라질 북부와 볼리비아·코스타리카·가이아나·온두라스·니카라과 일부까지 아울렀다. 면적 252만㎢로 한반도 크기의 11.3배. 거대 국가를 이룬 볼리바르는 브라질을 제외한 남미 대륙 전체를 통합하려 애썼지만 더 이상 뜻을 펼칠 수 없었다. 네 가지 이유 탓이다. 첫째는 리더십의 부재. 볼리바르의 실각(1829년)과 죽음(1830년) 직후인 1832년부터 나라가 갈라졌다.


둘째 요인은 신생 국가 건설보다 기득권 유지에 매달렸던 토지 귀족들의 반발. 독재의 힘으로 거대국가를 이룬 볼리바르의 구심력 이상으로 내 땅을 지키려는 백인 대지주들의 원심력이 컸다. 셋째, 일반 대중이 권력 상층부의 다툼에 무관심했다. 독립전쟁기에는 노예와 혼혈인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였던 볼리바르가 실은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의구심이 커지며 대중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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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네 번째 이유, 외세가 고비마다 훼방을 놓았다. 거대국가의 출현을 원하지 않았던 미국과 스페인은 그란 콜롬비아의 항진을 교묘하게 방해했다. 볼리바르는 미국의 제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1823년 의회에 제출한 연두교서에서 밝힌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그란 콜롬비아에 대한 간섭으로 여겼다. 불간섭 주의를 표방한 먼로 독트린이 발표되며 영국의 도움을 얻으려던 볼리바르의 외교정책에도 제동이 걸렸다.

볼리바르는 미국에 대한 방어막으로 영국과 동맹을 추진했었다. 볼리바르에게 먼로 독트린은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누렸던 유럽(특히 프랑스)의 지원을 남미에는 제한하려는 조치로 받아들였다. 먼로 독트린은 미주 대륙 전체를 미국이 영향권에 두려는 공식 선언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볼리바르는 ‘북쪽의 형제, 미국’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반자나 협력자로 인식하지 않았다.

볼리바르는 한 편지에서 “이 위대한 대륙의 머리 부분에 매우 강력하고 부유하며 전쟁하기를 좋아하는 나라,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나라가 있다 ”며 ‘자유라는 이름’ 아래 미주 대륙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미국의 존재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볼리바르의 예측대로 미국은 남미 여러 나라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었다. 스페인과 전쟁(1898)에서 승리한 뒤부터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중남미 군사정변에 개입한 회수는 50회에 이른다.

말년에 나라가 분열되고 반대파가 득세하는 상황을 지켜 본 볼리바르는 “내가 바다에서 쟁기질을 하고 바람에 씨앗을 뿌렸구나”라고 한탄했다. 마술적 사실주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로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고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미로 속의 장군’에 볼리바르가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메리카는 통치하기 불가능한 곳이니 혁명 투사들의 헌신은 마치 바다를 쟁기로 가는 셈이다. 그란 콜롬비아는 구제불능이므로 자제력을 상실한 군중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며 그 뒤에는 온갖 종류의 피부색을 지닌 폭군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다.”

백인 우월주의 느낌이 물씬 나는 볼리바르의 탄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중남미는 분열되고 끝없는 정쟁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가 바람에 뿌렸다는 중남미 통합의 씨앗은 생명을 잃지 않았다. 남미통합의 꿈은 국명 ‘볼리비아’와 ‘베네수웰라 볼리비아’에 남아 있을 뿐일까. 장담할 수 없다. 중남미에서는 통합 논의와 청사진을 ‘볼리바르 프로젝트’로 부른다. 중남미국가들의 지나간 부분집합인 그란 콜롬비아가 미래의 공집합이 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숱한 견제를 받겠지만.

중남미 통합의 소망은 요즘 시련을 겪고 있다. 볼리바르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국명까지 바꿨던 베네수웰라의 유고 차베스 사망 이후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과 함께 남미인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당장은 통합의 전망도 회의적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전용갑 교수의 연구논문(19세기 이후 통합주의의 역사 전개과정을 통해 본 21세기 중남미 통합운동의 회의적 전망)에 따르면 중남미 통합론은 스페인 식민지배로부터 독립의 수단(19세기)으로 시작해 세계적 패권을 장악한 미국에 대한 저항(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약 150년)을 거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21세기)으로 변모해왔다. 이게 라틴 아메리카에 국한된 문제일까. 지구촌 반대편 남미에서 세계와 우리가 보인다. 그란 콜롬비아는 잊혀진 지역과 나라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를 보는 망원경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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