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아듀 뉴 암스테르담, 굿모닝 뉴욕



855만명. 미국 뉴욕시의 인구다. 같은 생활권인 메트로 뉴욕을 기준 삼으면 2,000만명이 넘는 이 도시에는 여전히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몰려든다. 뉴욕은 옛날부터 그랬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경영하는 식민지로 뉴 암스테르담으로 불리던 17세기 중반 인구는 고작 1,000명 안짝. 적은 인구에도 뉴 암스테르담에서는 18개 언어가 쓰였다. 다양한 국적과 인종을 가진 사람들은 종교와 피부색을 떠나 단 하나의 가치를 공유했다. 돈벌이라는.

번영하는 맨해튼을 발견한 유럽인은 네덜란드에 고용된 영국인 항해가 존 허드슨. 수차례 탐험을 통해 이 지역에 양질의 모피는 물론 큰 배도 다니기 좋은 강들이 많다는 사실을 고용주들에게 알렸다. 네덜란드인들은 1621년 2만 길더를 들여 모피 집하장과 항구를 건설, 첫해에만 4만5,000길더의 모피를 유럽 각국에 팔았다. 맨해튼의 모피 무역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유럽인들의 발길도 분주해졌다.


네덜란드는 영유권을 보장받기 위해 지도를 만들었다. 인디언들에게 토지를 매입했다는 매매 증서도 꾸몄다. 인디언 추장이 맨해튼 섬을 단돈 24달러에 팔았다는 저 유명한 얘기도 이때 나온 것이다.* 네덜란드인 특유의 상술과 근면함으로 뉴 암스테르담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는 명성을 얻었다. 주변 국가들이 이를 가만 놔 둘리 만무.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와중에서 영국 국왕 찰스 2세는 뉴 암스테르담을 빼앗기로 마음 먹었다.

영국은 뉴 암스테르담을 정복하기 위해 전함 4척에 수병 150명, 육군 300명을 보냈다. 영국 함대가 뉴 암스테르담 앞바다에 나타나 항복을 요구했을 때 뉴 암스테르담은 공포에 빠졌다. 단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총독 스토이베산트는 끝까지 싸울 요량이었다. 자신감도 없지 않았다. 맨해튼 섬 북단에 설치한 목책(Wall)이 뉴 암스테르담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스토이베산트 총독이 1653년 구축한 목책은 튼튼했다. 끝을 뾰족하게 깎은 5m 길이의 나무를 1.2m 깊이로 땅에 박아 연결한 목책의 길이는 약 800m. 건설 비용이 다소 부담이었지만 스토이벤산트는 상인들에게 넘기리라 마음 먹었다. 네덜란드 상인들과 총독에게 다른 세금을 내려 주겠다는 확답을 받고서야 공사비 갹출에 나섰다. 뉴 암스테르담은 안보시설 건설을 비롯한 모든 게 흥정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스토이베산트 총독이 어렵게 구축한 목책은 영국군의 침공에 소용이 없었다. 영국군이 목책 부근에는 얼씬도 안 하고 남쪽 험난한 지형을 진군 코스로 잡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수비대는 침공군을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결국 영국 함대가 나타난지 13일 만인 1664년9월8일, 뉴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총독은 국기를 내렸다. 영국군은 피를 흘리지 않고 뉴 암스테르담을 손에 넣었다.


결사 항전을 다짐했던 스토이베산트 총독은 왜 마음을 바꿨을까. 시민들이 협조하지 않은 탓이다. 뉴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인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는 ‘돈과 현상 유지’를 원했다. 애국심 보다 모피와 사탕수수·노예무역을 통해 걷어 들이는 짭짤한 이익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상인들은 총독에게 ‘빨리 항복하라’고 다그쳤다. 심지어 스토이베산트의 동생과 아들까지 무역 상인 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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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주는 그림이 여기 하나 있다. 18세기 미국 화가 그린 레온 제롬 페리(Jean Leon Gerome Ferris)가 유화 78폭에 남긴 미국 역사 시리즈의 하나인 ‘뉴 암스테르담 함락(The Fall of New Amsterdam·1885년 작품)’은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영국 함대가 항구 가까이에 정박한 상황에서도 방어군 진영이 이상하다. 가운데 오른쪽 다리가 목발인 인물이 스토이베산트 총독. 젊은 시절 전쟁터에서 다리를 잃었던 그는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만류하는 통에 고민에 빠진 듯하다. 총독과 주변 인물들의 대화를 엿듣는 부인의 모습, 그 뒤에 칼을 쳐들고 전쟁을 외치는 듯한 인물들의 표정이 살아 있다.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깃발 아래 영국 함대를 바라보는 병사가 있고 해안포의 사수는 총독의 발사 명령을 오랫 동안 기다린 것 같다. 사수의 뒤로 해안포를 무심한 표정으로 조작하는 인디언도 등장한다. 화면 왼쪽의 파손된 풍차는 뉴 암스테르담의 고장 난 경제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토이베산트의 항복 결정으로 영국군은 무혈 입성했다. 네덜란드 수비대는 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초대 총독 미뉴이트가 인디언 추장에게 맨해튼 섬을 사들인 지 40년 만에 네덜란드는 알짜배기 섬을 영국에 빼앗겼다. 영국은 점령지의 현실에 놀랐다. 닻을 내리면 교회부터 세우는 영국인 정착촌과 달리 예배당 하나 없었다. 인종 구성도 잡다하고 기피 인종이던 유대인도 득실거렸다. 발달한 것이라고는 상거래와 무역과 금융뿐이었다. 영국은 문화 이식을 강제하기 보다 섬의 통치를 자율에 맡겼다.

이름이 뉴욕으로 변경되고, 네덜란드가 잠시 탈환해 뉴오렌지로 다시 바뀌는 와중에서도 돈과 물질을 밝히는 맨해튼의 습성은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영국과 네덜란드간 세 차례의 전쟁을 마무리한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소유권이 완전히 영국에 귀착된 1673년 이후 뉴욕은 본격적인 성장기에 접어들었다. 번영의 핵심은 월스트리트. 방어용 목책을 따라 병력 이동통로로 남겨둔 공터에 무역상과 금융업자가 모여들어 성장을 이끌었다.

목책은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채 사라졌어도 월 스트리트라는 이름을 남겼다. 미국인들은 월가의 성장을 마냥 반겼을까. 모두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경제사가 존 스틸 고든의 명저 ‘월 스트리트 제국’(번역 강남규)에 따르면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인물이자 제3대 대통령을 지낸 토마스 제퍼슨은 뉴욕 금융시장을 이렇게 평가했다. ‘인간성이 사라진 곳.’ 제퍼슨의 우려가 옛날 얘기로 끝나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탐욕의 머니 게임이 여전하니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네덜란드가 뉴암스테르담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한 페터 미뉴이트는 1624년 인디언 추장에게 조잡한 구슬과 도끼 등 60길더(24달러)에 해당하는 물품을 주고 맨해튼 섬을 사들였다. 오늘날 맨해튼 마천루의 가격을 생각하면 인디언 추장은 바보 중의 바보 같지만 반전이 있다. 만약 인디언 추장이 60길더에 해당하는 자금을 가지고 채권을 샀고 후손들이 고이 물려 받았다면 계산이 달라진다. 복리 이자효과로 맨해튼 섬의 부동산 가격 총액을 훨씬 웃도는 재산으로 불어났을 것이라는 얘기다. 맨해튼을 매각한 인디언 추장의 사례는 장기적인 채권투자를 강조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쓰인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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