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영화의 반전, 현실의 반전

송영규 논설위원

실제 세상에선 볼 수 없는

허구 속 통쾌한 결론

이젠 평범함이 승리하는

영화 같은 현실 보고 싶다





영화를 보는 가장 큰 묘미는 막판 반전이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말이 터질 때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그 잔영은 오래오래 남는다. 추석 연휴 기간 봤던 영화 ‘터널’의 느낌이 바로 그랬다. 무너진 터널 속에 한 달 넘게 갇힌 뒤 구조되면서도 주인공은 ‘살았다’고도 ‘고맙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가 생명을 구한 뒤 세상을 향해 외친 첫 마디는 ‘다 꺼져, 이 XXX들아.’ 생명을 홍보 수단으로 생각하는 후안무치에, 국민 안전보다 비용을 더 중요시하는 잔인함에, 부실로 점철된 사회에 대한 일갈이었다.

뻔한 결말을 예상한 관객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것이 영화였다는 점. 현실은 다르다. 배는 침몰했고 300명은 2년 반이 다 되도록 차가운 진도 앞바다 속에 갇혀 있다. 다 꺼지라고 욕할 생존자도, 이들을 구하려는 구조대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와는 전혀 다른 결말이다. 영화 ‘명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충(忠)=임금’을 생각했던 관객들의 허를 찔렀다. “무릇 장수 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현대식으로 하자면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쯤 되겠다. 이 영화를 무려 1,761만명, 우리 국민 3명 중 1명이 보고 감동을 받았다. 현실에서는 똑같은 말을 한 정치인이 ‘배반의 정치’로 낙인찍혀 총선조차 못 나올 뻔했다. 픽션이기에 가능한 반전,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 있는 곳, 이것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다.


물론 현실에도 반전이 있다. 그것도 단 한방으로 모든 것을 바꾸는 극적인 장면을, 위기가 기회가 되고 수세가 공세로 바뀌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봐왔다. 멀리 볼 필요 없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리 의혹과 서별관 회의 논란을 잠재운 것은 이석수 특별감찰관의 ‘국기를 흔드는’ 기밀 누설과 ‘부패한 기득권 언론 세력’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의 대우조선해양 비리 의혹이라는 카운터펀치였다. 3년 전의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역시 ‘인터넷을 난리 나게 만든’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사건으로 단번에 역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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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격이 있을 때마다 상대방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채 전 검찰총장은 근황조차 알기 힘들고 송 전 주필은 파렴치한 비리 언론인이 됐다. 재기 불가능할 정도의 치명상이다. 스스로 사표를 냈던 이 특별감찰관도 이번 정부에서는 힘을 쓰기 힘들게 됐다. 이 정도면 ‘처절하고 완벽한 패배’다. 박근혜 대통령의 역공은 그만큼 격렬하고 예리하며 치명적이었다. 이길 줄 아는 정치인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대통령의 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말 한마디로 이미 결정이 끝난 정책의 운명도 바꿨다. 국민들의 원성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전기료 누진제는 대통령의 ‘검토’ 발언 한마디에 없었던 일이 돼 버렸고 최적의 장소이며 재배치는 없다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도 결국 제3 후보지로 방향을 틀었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물러섬 없는 전투에서 승자는 언제나 대통령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패자였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대통령의 눈에만 들면 국민이야 뭐라고 떠들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사청문회 때는 쏟아지는 비리 의혹에 연신 ‘송구하다’는 말을 달고 다녔던 장관 후보자가 임명되자마자 ‘흙수저 출신이라서 무시당했다’며 펄펄 뛰는 것도 우 수석이 수많은 의혹과 압력에도 끄떡하지 않고 버티는 것도 같은 배경이다. 권력과 힘을 가진 이들이 국민이 아닌 대통령을 바라보는 사회에서는 기자 휴대폰에 대한 압수수색도 아무 일이 아닌 것이 된다. 이것이 현실이다.

‘터널’의 반전은 일반인의 세상을 향한 외침이었다. 그 힘으로 한 작품은 한국 최고 관객을 동원했고 다른 작품은 올여름 최고의 흥행작으로 1,000만명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현실 속 대통령의 반전은 누구를 향한 외침일까. 국민일까 관료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일까. /송영규 논설위원 skong@sedaily.com

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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