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 하면 떠오르는 것은 한우다. 수십년간 공들여 이뤄놓은 대표 브랜드로 이제는 횡성한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렇다고 횡성이 한우로만 유명한 것은 아니다. 태기산과 청태산·치악산 일부가 병풍처럼 둘러싼 횡성의 들판을 주천강과 섬강이 흐르고 있다. 이 밖에 중금리 삼층석탑과 풍수원성당 등 문화적 콘텐츠도 풍부하다. 짙푸른 자연휴양림과 안흥찐빵도 빼놓을 수 없다. 눈과 입이 즐거운 강원도 초입, 횡성으로 발길을 옮겨보았다.
강원도 횡성군 풍수원에 마을이 들어선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다. 경기도 용인에서 신태보를 비롯한 4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피난처를 찾아 정착한 것이 시발이다. 1866년 병인박해를 전후해 신자들 사이에 “박해를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지역”이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신도의 숫자가 더욱 늘었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1871년 신미양요까지 8,000~1만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다. 이런 소식이 프랑스에 전해지자 ‘천주교의 보호자’를 자처한 프랑스 정부는 군함에 선교사 열두 명을 태워 조선으로 보냈다. 그 중 9명이 선교활동 중 순교했다. 이에 격분한 프랑스는 또다시 군함 7척을 보냈고 이것이 1866년 병인양요다.
횡성 풍수원성당은 이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 설립됐다. 1888년 프랑스인 르메르 신부가 부임했고 초대 신부로 사역을 시작했다. 르메르 신부가 주임신부를 맡은 데 이어 보좌신부로 사역을 하던 정규하 신부가 주임신부로 발령 받아 중국인 건축가를 시켜 1905년 설계했고 2년 뒤 준공했다.
풍수원성당은 서울 중림동의 약현성당, 전주 고산성당, 서울 명동성당에 이어 네 번째로 건설된 성당이자 우리 국민에 의해 건설된 첫 번째 성당이며 강원도에 지어진 첫 번째 성당이다. 건평 120평에 불과한 아담한 시골 성당이지만 한때 12개 시·군 신도 2,000명이 소속됐고 공소 29곳을 거느렸다. 신부가 공소를 한번 돌아보는 데 3년이 걸릴 정도로 넓은 구역을 관할했다.
이 같은 역사를 가진 풍수원성당은 규모는 작지만 풍부한 볼거리가 있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의 과정을 형상화한 십자가의 길과 돌을 묵주 모양으로 박아놓은 광장은 커다란 고상이 묵주의 메달 구실을 하고 있어 눈길이 자꾸만 간다. 천주교 성물과 민속생활기구 등을 전시한 박물관을 둘러보려면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특히 이곳은 한국전쟁 3년을 제외하고는 1920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성체 현양대회를 열고 있다. 풍수원성당은 1982년 강원도지방유형문화재 69호로 지정됐다.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경강로유현1길 30.
새벽에 찾은 주천강은 전날 내린 비로 흙탕물이 흐르고 있었다. 치악산에서 발원해 남한강으로 합류하는 물길은 굽이마다 절경을 이루며 서쪽으로 향한다. 특히 둔내를 지나가는 물길은 주변의 산세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기 때문에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주천강휴양림에서 접근하면 휴양림을 따라 오른쪽으로 내려가면서 강줄기가 나오는데 강을 따라 데크를 조성하고 있어 조만간 강을 조망하는 길이 완성되면 보다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절벽 위에서 주천강 하류를 내려다보는 요선정은 주변 화강암 암반들과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암반 복판에는 자갈이나 모래가 물이 돌아가는 원심력에 의해 소용돌이치며 만든 돌개구멍이 나 있는데 크고 작은 돌개구멍에는 맑은 물이 고여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주천강 상류 쪽은 물길이 가늘어지면서 계곡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강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를 달리다 차를 세우고 천변으로 내려가면 발을 담그고 더위를 쫓는 탁족을 할 수 있다. 상류에서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법흥사 구경을 할 수도 있어 자연을 보는 즐거움에 문화재 구경이라는 부수입을 더할 수 있다.
◇횡성한우축제=오는 30일부터 10월4일까지 5일간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섬강 둔치에서는 ‘제12회 횡성한우축제’가 열린다. 우수한 품종의 한우를 저렴하고 풍성하게 맛볼 수 있는 한우주제관, 한우놀이터 체험, 한우축제 100배 즐기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된다. /글·사진(횡성)=우현석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