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유럽의 판도와 영어를 바꾼 노르만 정복





1066년9월28일, 잉글랜드 남부 페븐지(Pevensey). 런던으로부터 98.7㎞ 떨어진 이 곳의 해안에 700여척의 배가 닿았다. 크고 작은 배에서 쏟아진 것은 군대. 모두 8,200여 기병과 궁병, 보병(전체 병력이 1만명이 넘었다는 추정도 있다)이 배에서 내렸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침략을 당했지만 잉글랜드에 이만한 규모의 병력이 한꺼번에 상륙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왜 이토록 많은 병력이 몰려 왔을까. ‘무력을 통해서라도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다.


야심만만한 노르만디 공작 윌리엄(당시 39세·프랑스식 이름 기욤)은 애초부터 잉글랜드의 왕권을 노렸다. 명분도 있었다. 먼 친척인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가 어린 시절 윌리엄에게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약속했다는 게 가장 큰 명분. 막상 왕위는 에드워드 국왕이 1066년 초 사망한 뒤 다른 인물이 가져갔다. 잉글랜드 현인회의가 유력 가문 출신인 헤롤드(Harold Godwinson·당시 44세)를 국왕으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헤롤드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했다는 소식을 접한 윌리엄은 분노에 떨었다. 곤궁에 빠졌던 헤롤드를 도와주면서 군신 관계를 맺은 이상 적법한 왕위계승권이 자신에게 있다며 각지에서 기사와 병력을 모았다. 노르만디 공작의 사생아 출신으로 부친의 공작 자리까지 물려받았던 윌리엄은 용이주도하게 일을 꾸몄다. 헤롤드가 잉글랜드 왕위를 인정받으면 유럽의 봉건 군신관계가 무너진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막대한 헌금으로 교황까지 같은 편으로 끌어 들었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잉글랜드에 상륙한 윌리엄은 보름여 뒤 벌어진 헤이스탕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잉글랜드 군대는 용케 버텼지만 헤롤드가 전사하면서 그대로 무너졌다. 윌리엄은 크리스마스를 골라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윌리엄이 손쉽게 잉글랜드를 차지한 데는 세 가지 비결이 있었다. 첫째, 노르만디의 경제력과 문화 수준이 잉글랜드보다 높았다. 둘째, 입체적 전력을 갖고 있었다. 헤롤드의 잉글랜드 군대가 농민 출신의 징집 보병 위주인 반면 윌리엄의 군대는 궁수의 엄호 사격 아래 기사가 돌격해 승기를 잡고 보병이 마무리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프로 군대가 아마추어 군대를 이긴 것이다.

세 번째, 운이 좋았다. 잉글랜드 원정군이 폭풍에 발이 묶여 도버해협을 건너지 못하는 동안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또 다른 경쟁자인 노르웨이 국왕이 잉글랜드 북부에 상륙한 것. 남부에서 잔뜩 긴장한 채 윌리엄을 기다리던 해롤드는 급히 병력을 돌려 노르웨이 침공군을 격퇴했으나 친위대 대다수를 잃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지 불과 하루 뒤에 노르만 침공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오느라 기진맥진한 농민 군대의 패배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잉글랜드인들은 노르만 군대에 5년간 저항했으나 윌리엄은 속으로 웃었다. 오히려 앵글로색슨과 데인족 귀족의 반란을 토지 몰수의 기회로 여겼다. 노르만디를 출발할 때부터 귀족과 기사들에게 토지 하사를 약속했던 터. 잉글랜드 전역의 인구와 토지·가축 등 재산 상태를 샅샅이 조사한 기록을 담은 ‘둠스데이북(1086년)’에 따르면 190여명에 이르는 남작 계급이 모두 노르만 출신이었다. 윌리엄은 하급 기사들에게도 작은 단위로 토지를 하사해 충성심을 이끌어내며 대귀족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인구 약 140만명의 잉글랜드를 불과 1만명여의 침공군이 차지한 ‘노르만 정복(Norman conquest)’은 거대한 흔적을 남겼다. 잉글랜드에 성(城)이 본격적으로 축성된 시기가 이때부터다. 소수의 노르만이 최후의 순간에 대비해 앵글로색슨족을 동원해 방어거점을 쌓기 시작한 게 오늘날 영국의 성들로 남아 있다. 한때 염원이었던 ‘스칸디나비아 제국’(북해 제국)의 꿈도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대신 잉글랜드는 유럽 대륙과 관계가 긴밀해졌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바다를 떠돌던 바이킹이었으나 프랑스 북부에 정착해 완전 동화한 노르만은 영어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화한 노르만의 정복이 없었다면 현대영어는 독일어와 보다 가까운 형태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인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긴 정복자들은 노르만-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삼았다. 상류층과 지식인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영어는 하층민들의 구어체 언어로 위치가 떨어졌다. 특히 노르만 정복기에 쓰인 지배층의 언어였던 프랑스어의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법률과 군사, 종교, 오락 용어에 상당수 남아 있다.** 어휘 뿐 아니라 문법도 크게 변했다. 게르만어의 영향으로 성(性·gender)과 격(格·case)이 복잡했던 고대영어가 단순화하고 대신 전치사가 크게 늘었다. 영어가 단순해진 것은 하층민들이 사용하면서 보다 쉬운 방향으로 변형을 거듭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무려 1만여개의 프랑스계 어휘가 들어오면서 영어의 표현도 보다 풍부해졌다. ***


노르만 정복은 뜻하지 않은 결과도 낳았다. 까다로운 기준 아래 기록 남기기를 중시했던 노르만의 영향으로 문서가 크게 늘어났다. 옥스퍼드 영국사에 따르면 로마군이 잉글랜드를 떠난 450년부터 1066년까지 앵글로색슨이 남겨놓은 영장과 특허장은 약 2,000건에 불과하지만 노르만 치하에서는 13세기의 소토지 보유문서만 800만건에 이른다. 노르만의 식민지 관리가 그만큼 철저했다는 점과 더불어 기록이 일상생활화됐다는 얘기다. 기록의 중요성은 국왕의 문서를 작성하는 상서청(chancery)과 회계청(exchequer) 설치로 이어졌다. 영국 관료제의 싹이 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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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만 정복은 영국 민주주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먼저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 하사한 봉토(封土)를 기반으로 힘이 커진 귀족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윌리엄의 셋째 아들인 헨리가 1110년 즉위식에서 발표한 ‘자유헌장(Charter of Liberties)’ 14개 조문에는 귀족의 특권과 자유민의 권리 존중, 상속·결혼·후견·과세에 부당한 강압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이 담겼다. 의회 민주주의의 뿌리라는 1215년 대헌장(Magna Carta)도 자유현장이 모태다.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무려 116년(1337~1453) 동안 싸웠던 백년전쟁의 뿌리도 노르만 정복에 있다. 윌리엄은 물론 그 후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잉글랜드가 아니라 노르만디에서 보냈다. 노르만디를 큰집, 잉글랜드를 작은 집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윌리엄은 죽으면서 장남에게 노르만디를, 차남에게는 잉글랜드를 물려줬다. 시간이 흐르고 정략 결혼을 통해 잉글랜드 왕이 소유한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국왕보다 더 커진 적도 있었다. 프랑스의 반격으로 노르만디를 비롯한 영토를 대부분 빼앗긴 잉글랜드가 절치부심하며 영유권을 주장한 게 백년전쟁의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노르만의 침공으로 상류 노르만과 하층 앵글로색슨으로 분열했던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오랜 전쟁을 통해 하나의 국민으로 뭉쳐졌다. 모든 공용어의 자리를 프랑스어에 내줬던 영어도 1363년 의회 개회사에서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1489년에는 국왕과 의회, 법원의 모든 문서에서 프랑스어를 버리고 영어만 쓰도록 강제하는 법률도 만들었다. 영어가 빼앗겼던 자리를 되찾는 데는 42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잉글랜드 사회가 민족 간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데에도 그만큼 시간이 걸렸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인들이 오늘날까지 정복왕 윌리엄을 존경하는 이유가 있다. 윌리엄은 앵글로색슨족의 재산을 빼앗으면서도 법률과 전통은 그대로 살려두고 인재에 대해서는 우대책을 펼쳤다. 최소한의 관용과 융·복합이 이민족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고 세계로 발전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던 셈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애초에 영국에 살던 원주민은 스페인지역에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베리아족. 원시 부족인 이들을 몰아내고 켈트족이 들어왔으나 로마의 침입으로 민족이 갈렸다. 로마화한 켈트족은 주로 잉글랜드에 남고, 로마에 끝까지 맞선 켈트족은 서쪽 산악 지대인 웨일즈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 남아 켈트의 정체성을 지켰다. 잉글랜드에 주둔하던 로마군단이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따라 본국으로 돌아가자 라틴화한 켈트족은 다급해졌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켈트족의 침공과 복수 위협에 떨다 여러 게르만족에게 도움을 청했다. 앵글족과 색슨족, 주트족과 데인족이 차례로 들어와 왕권을 차지하고 나라가 분열되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피가 섞였다.

주류는 앵글로색슨족. 상류층은 데인족이던 잉글랜드에 노르만족이 침입해 정복한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노르만족은 잉글랜드에 정착한 데인족과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같은 곳에 거주하던 동족이었다는 점. 바다를 떠돌며 약탈을 일삼던 게르만계 바이킹의 일족이었던 데인족은 바이킹의 습격에 진저리를 치던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거대한 영지를 하사받은 후 민족성이 빠르게 바뀌었다. 데인족 특유의 호전성을 유지하면서도 프랑스 문물에 완전 동화한 것.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여겼다.

반면 영국에 진출한 데인족은 유럽 문명 본류를 접하지 않은 탓인지 민족성을 그대로 유지해왔으나 프랑스 데인족, 즉 노르만족에게 정복 당하고 말았다. 노르만 정복 직전 잉글랜드를 크게 발전시킨 데인족 출신 크누트 대왕의 꿈이 바로 스칸디나비아 제국이었다. 혈연적 공통점이 있는 노르웨이와 스웨덴, 덴마크, 독일 북부, 잉글랜드를 하나의 제국으로 묶겠다는 크누트 대왕의 꿈은 ‘노르만 정복’으로 희미하던 가능성까지 사라졌다. 잉글랜드 문학 사상 최초의 작품인 베어울프(Beowulf)는 게르만족 영웅에 대한 서사시다. ‘햄릿’을 비롯한 세익스피어 작품의 무대가 주로 덴마크라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 장정승 경북대학교 교수의 연구논문 ‘현대 영어에 나타난 차용어의 분포적 특성’(언어과학연구, 2004년)에 따르면 영어 단어의 절반 이상이 노르만-프랑스의 영향을 받았다. 워싱턴 대통령의 취임연설에서 쓰인 어휘의 45.9%가 프랑스계로 29.6%에 그친 앵글로색슨계보다 훨씬 많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연설에서는 앵글로색슨계 어휘의 비중이 48%로 가장 높았지만 프랑스계 어휘도 36.6% 사용됐다. 현대 영어의 품사별 어휘를 분석하면 명사의 경우가 특히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앵글로색슨계 품사는 부사의 비중만 압도적으로 높게 나왔다. 신체 부분과 의식주과 관련된 어휘 역시 앵글로색슨계 어휘의 비중이 높다.

*** 중세 영어의 흔적 중 하나. 프랑스에서 들어온 preux란 단어는 원래 ‘용감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 ‘용맹한 기사’라는 뜻의 명사였다. 지금도 그렇게 쓰인다. 영어에서는 이 단어가 음운변화를 일으키며 proud로 변했다. ‘자랑스러운’과 ‘오만한’이라는 의미를 둘 다 갖고 있다. 노르만 정복자들은 전자의 의미로 앵글로색슨 피정복민들은 후자의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같은 단어를 두고 주인과 하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데서 두 가지 뜻으로 남은 것이다. 동서고금을 떠나 언어란 보는 입장에서 정의되기 마련인가 보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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