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슐츠 선언 그리고 개도국 외채 위기



1982년9월30일 뉴욕. 36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 나선 조지 슐츠 미국 국무장관이 목청을 높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개발도상국의 채무에 대한 감독을 강화해야 한다. 개도국들도 원자재 수출을 늘려 채무 상환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 또한 서구의 입맛에 맞는 수출품을 내놓아야 하며 자유무역만이 위기의 개도국 경제를 구제할 수 있다.’

슐츠 발언의 배경은 제3세계 외채 증가와 멕시코의 대외 채무 지불 중지(Moratorium) 선언. 1970년대 중반까지 1,300억~1,900억 달러를 오가던 개도국의 채무 총액이 1982년 7,470억 달러로 급증한 상황. 개도국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개도국들은 선진국들의 채무재조정을 바랐다. 870억 달러의 대외 채무를 지고 있던 멕시코는 1982년8월 대외 지불 정지까지 선언했다.


슐츠 선언은 개도국 스스로 부채가 급증한 책임을 지라는 얘기였다. 채무재조정을 기대하던 개도국들은 슐츠 선언에 얼어붙었다. 여기저기서 불만도 터져 나왔다. 채무 급증의 원인이 개도국의 잘못이 아니라 선진국의 금리 정책이 빚어낸 결과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었을까. 선진국과 개도국 모두에게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채무가 불어난 원인은 크게 세 가지. 무엇보다 미국과 영국의 고금리 정책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영국은 1979년 6월부터 8월말까지 기준 금리를 연 12%에서 17%로 5%포인트나 올렸다. 전쟁을 제외하고 이토록 짧은 기간에 금리가 충격적으로 인상된 것은 처음이었다. 물가 오름세 속에서 경기침체가 계속되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고육책이었으나 채무국들의 이자 부담도 덩달아 많아졌다. 더욱이 미국도 영국을 따라 금리를 20%까지 올리는 ‘볼커 충격’을 선택한 뒤, 개도국들의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두 번째 이유는 1979년 이란 회교 혁명으로 촉발된 2차 석유파동. 유가 인상으로 늘어난 석유 수입 비용을 외국에서 빌리며 채무액이 커졌다. 반면 개도국의 수출은 줄었다. 석유 파동 속에 세계 경제도 침체된 탓이다. 세 번째는 개도국들의 잘못된 외환 정책. 국제수지 악화로 환율을 올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자국 화폐의 고평가를 고집하는 통에 국내 자본의 유출 현상으로 이어졌다.


슐츠 선언은 파장을 낳았다. 멕시코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포르티요 대통령은 ‘이미 3배로 올라버린 이자비용 증가분은 채권국에도 책임이 있다.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경우 개도국의 힘을 합해 집단적인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을 선언하겠다’며 맞섰다. 채무액이 가장 많았던 브라질 등이 이에 동조했으나 저항은 통하지 않았다. 포르티요는 오히려 권좌에서 밀려났다. 집단행동을 위한 힘을 모으려던 포르티요의 후임 대통령 자리에는 선진국에 고분고분한 인사가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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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구심점을 잃은 개도국들이 1980~1986년 중 상환한 외채는 6,580억달러. 절반 이상이 이자로 나갔음에도 1조3,000억달러라는 연체금액이 남았다. 결국 라틴아메리카는 연쇄적인 국가부도에 휘말려 IMF의 관리 아래 수도와 전기·석유·천연가스와 은행 등 국영기업을 외국자본에 팔아 넘겼다. 슐츠 선언은 개도국을 향해 재산정리 절차를 알리는 포고문이었던 셈이다.

미국과 영국은 개도국에게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1982년4월초 발발한 포클랜드 전쟁도 채무 관계로 설명이 가능하다. 채무 재조정을 요구하는 외채대국 아르헨티나에 대한 채권국 영국의 강력한 경고가 전쟁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포클랜드 전쟁 내내 미국이 영국을 도와준 데에는 개도국들에 대한 경고도 깔려 있었다. 채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무력까지 동원할 수 있다는 경고 메세지를 날린 것이다.

1980년대 중반을 국제적 이슈였던 제3세계 외채 문제는 해결됐을까. 그렇지 않다. 개발도상국들의 2015년 대외채무는 5조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뾰족한 해결 방법이 없다는 점. ‘제3세계외채탕감을 위한 위원회’ 총재인 에릭 뚜쌩과 동 위원회 프랑스 지부장인 다미앵 미예의 공저 ‘신용불량국가’에 따르면 오히려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두 저자는 이 책에서 ‘1980년대에 개도국의 대외채무가 100억원이었다고 치자. 지난 20년간 개도국은 750억원을 갚았다. 그런데도 아직 부채가 400억이나 남아 있다’고 강조한다.

채권국들은 가끔 부채를 탕감해 주지만 손실을 거의 입지 않는다. 부채를 탕감받는 국가들은 하나같이 원자재 수출가격 하락을 겪었다. 부채 탕감 금액과 선진국들이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입은 이익 규모가 거의 비슷하다. 부채 탕감과 함께 구조 조정 압력도 함께 받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지원을 받고 나면 주요 산업과 공공부문의 민영화, 해외매각이 따라 붙기 마련이다. 개도국의 경제는 더욱 더 선진국에 의존적인 구조로 바뀌어 가고 있다.

한국도 외채로 굴곡을 겪었다.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서울평화상을 수상(1992년)한 슐츠가 일찌감치 제안한 대로 IMF 구제금융도 받았다. 이제는 안심할 수 있을까. 외환보유액이 3,754억 달러 이상이지만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외채가 4,400억 달러에 주식시장에 들어온 외국인 간접투자 규모가 4,000억 달러가 넘는다. 미국이 미뤄놓은 금리를 인상할 경우 신흥국들의 자금이 미국으로 빠져나가고 대외채무의 금리도 높아질 가능성이 남아 있다. 슐츠 선언에 담긴 약육강식의 국제 금융 논리에서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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