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자이언트, 거대유전시대의 개막





1930년10월3일 오후 8시, 텍사스 동부 데이지 브래드포드의 농장. 지축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원유가 솟구쳤다. 세상이 마치 암흑으로 변한 것처럼 하늘이 온통 검게 물들었다. 석유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유전 발굴의 하나로 손꼽히는 ‘대드 조이너’의 유전 발견 순간이다. 미국 최대의 유전 지대였다는 평가 속에 아직도 새로운 유전이 발견된다는 동부 텍사스 유전지대가 세상에 알려진 순간이기도 하다.


조이너의 유전 발굴이 왜 극적이었나.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무엇보다 미국 유전의 가능성이 다시 열렸다. 대형 유전이 발견된 것은 스핀틀 탑 유전(1901년) 이후 29년 만이었다. 두 번째는 끈기와 과학기술의 승리였다는 점이다. 한계로 여겨졌던 지하 3,500피트를 넘어 3,561피트(1,078m)에서 기름층을 찾아냈다. 세 번째, 아마추어가 프로를 이겼다. 강단(講壇)지질학자들은 ‘텍사스 동부에 거대한 유전이 있다’는 닥터 로이드의 주장에 코웃음을 쳤다. 지질학을 독학으로 공부해 ‘닥터 로이드’라고 불렸을 뿐 의사도, 박사도 아닌 그의 말을 믿은 것은 오로지 조이너 뿐이었다.

조이너 개인도 화제를 뿌렸다. 우선 나이가 많았다. 가망 없을 것이라던 동부 텍사스에서 3년 동안 채굴에 매달린 끝에 유전을 찾았을 때 나이가 70세. 마지막 1달러까지 쓰고나서야 그는 대박을 거머쥐었다. 본명 콜럼버스 마리온 조이너(Columbus Marion Joiner) 대신 ‘대드(Dad) 조이너’란 별칭이 더 많이 알려진 이유도 나이가 많았던 데다 텍사스 유전의 대부 격이었기 때문이다.*

지역 언론들은 유전 발견을 ‘조이너의 시추정, 마침내 대 분출 시작’이라는 제목의 톱 기사로 다뤘다. 그럴 만 했다. 일단 규모가 컸다. 최대 유전인 스핀들톱 유전보다 원유 분출량이 5배나 많았다. 조이너가 유전을 발견한지 불과 두 달 만에 25㎞ 떨어진 지점에서 다른 채굴자들이 또 하나의 대박 유전을 찾아냈다. 이듬해 1월에도 비슷한 규모의 유전이 부근에서 터졌다. 훗날 규명됐지만 연이어 발견된 유전들은 한 덩어리였다.

연 면적 570㎢. 거대한 기름 밭의 크기를 한반도로 옮기면 비무장지대(DMZ) 아무 곳에서나 땅을 파면 원유가 솟았다는 얘기가 된다. 동부 텍사스에서 발견된 이 유전은 곧 ‘블랙 자이언트(Black Gaint)’라는 이름을 얻었다(요즘은 동부 텍사스 유전지대라는 용어가 더 많이 쓰인다). 제임스 딘, 록 허드슨,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한 1956년 개봉작 ‘자이언트’의 제작자도 ‘아무 곳에나 원유를 뽑아 거부가 될 수 있다’던 1930년 텍사스의 석유개발 붐에서 영화제작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연달아 발견되는 거대 유전은 사람과 자본을 끌어모았다. 뉴욕 월가의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에도 이 곳 일대는 북적거렸다. 순식간에 채굴탑이 1,000개를 넘어섰다. 지역 언론들은 조이너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우리를 인도한 제2의 모세’라고 추어올렸다. 조이너의 사인이 들어간 증서는 지역 화폐로도 쓰였다.

정작 ‘제2의 모세’로 불렸던 조이너 할아범은 채굴권을 대부호인 헤롤드슨 헌트에게 팔아 버렸다. 가격은 134만 달러. 헌트는 다른 곳에서도 유전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조이너에게 알리지 않은 채 조이너측의 채굴 기사를 2만 달러에 매수, 가격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계약을 맺은 후에야 속았다는 사실을 파악한 조이너는 헌트와 소송전을 펼쳤으나 곧 취하하고 말았다. 채굴권을 둘러싼 다른 소송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때 300만 달러를 넘던 조이너의 재산은 사망(1947년·87세)할 때 거의 남지 않았다. 또 다른 유전을 찾겠다며 자금을 쏟아부은 탓이다.


조이너의 채굴권을 사들인 헌트의 자본력은 동부 텍사스의 유전 개발에 속도를 붙였으나 문제가 생겼다. 공급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한 것. 불경기로 위축될 대로 위축된 수요에 석유가 쏟아져 가격이 걷잡을 수 없이 내려갔다. 1930년 배럴당 1달러였던 휘발유 값이 1931년 말에는 생산원가 배럴당 18센트에도 못 미치는 15센트로 떨어졌다. 경쟁 격화로 2센트를 받는 업자도 생겨났다. 보다 못한 텍사스 주지사가 주방위군을 동원해 ‘석유계엄령’을 내리고 생산을 통제한 것도 이 무렵이다. 연방 정부도 이를 거들었다. 원유 채굴과 석유 가격 규제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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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산 석유 가격은 제2차 세계대전을 맞고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연합국 승리의 원동력이 된 것도 물론이다. 미국 정부는 장거리 송유관을 깔았다. 철도와 트럭 화물업자들의 반대를 뚫고 텍사스에서 뉴저지까지 8개 주와 20개 강을 통과하는 총연장 2,018㎞짜리 송유관 덕분에 연합국은 기름 걱정 없이 전쟁을 치렀다. 이전보다 구경이 5배나 큰 24인치여서 ‘빅 인치(Big Inch)’라고 불린 텍사스 석유 송유관은 정부가 앞장 서서 건설하는 에너지 인프라 시대도 열었다. 전쟁을 통해 운송 인프라의 중요성을 확인한 미국은 전후에 노후 송유관을 최대 직경 48인치짜리로 교체하고 새로운 노선을 깔았다. 미국의 송유관(가스 포함) 총연장은 80만㎞ 이상으로 2위인 러시아보다 3배 이상 길다

텍사스 유전의 흔적은 더 있다. 요즘도 대형유전을 지칭할 때 ‘자이언트급 유전’이란 용어가 쓰인다. 생산능력 500만 배럴 이상의 자이언트급 유전은 전 세계에 약 932개에 이른다. 조이너의 유전 발견 이후 그만큼 신규 유전 발견이 많았다는 얘기다. 자이언트급 유전은 모든 유전의 불과 1%에 불과하지만 채굴가능량이 40%를 차지한다. 자이언트급이 주로 몰린 곳은 27개 지역. 주로 중동 지역에 있다.

경쟁의 와중에 동부 텍사스 유전의 대부분을 차지한 헌트 가문은 지금까지 석유업계의 실력자로 남아 있다.** 조이너의 유정에서 뿜기 시작한 텍사스 석유의 덕을 가장 많이 누린 사람들은 부시 가문. 아버지가 1930년대 중반 이후에 해상 유전을 발견하고 아들은 1970년대 중반에 텍사스에서 석유사업으로 돈을 벌어 정치에 투신, 대를 이어 미국 대통령직에 올랐다. 부시 가문의 손자 대에도 대통령 후보를 바라본단다. 텍사스 석유의 영향력이 참으로 질기고 강하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조이너는 매우 특이한 사람이었다. 자본을 모으려고 유명인사나 그 자손들을 끌어 들이려던 당시의 석유사업자들과 달리 그는 철저하게 홀로 움직였다. 예를 들어 남북전쟁에서 남부군 총사령관이었던 리 장군의 후손을 내세워 ‘제너럴 리 석유개발회사’ 등이 성행하던 시절에 조이너는 주변의 자금과 3류급 장비로 유전을 찾아 나섰다. 삶의 궤적도 특이했다. 어려서 7주 교육을 받은 게 공교육의 전부. 대신 집에서 성서로 읽기를, 기네스북으로 쓰기를 배워 법률사무소까지 차린 사람이다. 20대 후반 테네시 하원 의원을 지내고 귀향해 농장을 운영하던 중 유전이 묻힌 땅의 가치를 모르고 팔아버렸던 경험을 뼈아프게 여겨 유전 개발에 나섰다고 한다.

** 헌트는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종교의 신도가 아니면서도 복수의 여성과 결혼하는 중혼(重婚)으로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 세 명의 아내가 낳은 자녀 15명 명 가운데 두 명은 은(銀) 투기로 국제금융시장을 뒤흔든 적도 있다. 1차 석유파동의 후유증으로 물가가 급등하던 1974년, 헤롤드슨 헌트와 첫째 부인 사이의 2남과 4남이던 벙커(Bunker), 허버트(Herbert) 형제는 ‘인플레이션 헷징과 차익 실현’을 위한 은 매집에 나섰다. 이때 은 시세는 온스당 3.27 달러. 세계적 부호의 매집에 가격은 6.70달러로 뛰었다. 선물시장에서 대량 주문을 내고 현물시장에서는 실물을 거둬들이는 수법, 즉 ‘사자’를 극대화하고 ‘팔자’는 최소화하는 형제의 전략에 은 가격은 1980년 1월 온스당 50.06달러까지 올랐다.

헌트 형제는 모두 100억 달러 어치의 은을 사들였다. 그러나 사상 최대의 투기작전은 성공 직전에 무너졌다. 채산성 악화로 폐쇄됐던 광산이 재가동되고 장롱 속 은이 쏟아지며 공급이 넘쳤기 때문이다. 정부도 규제에 나섰다. 당황한 헌트 형제는 은행돈으로 시세를 떠받쳤다. 두 달간 미국 전체 대출금의 10%를 빌려 가격 부양에 나섰지만 3월 초 가격은 40달러 이하로 내려갔다.

파국이 찾아온 것은 1980년 3월. 헌트 형제의 대출상환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은 시세가 반토막 나며 온스당 10.80달러로 떨어졌다. 증시까지 덩달아 흔들린 ‘실버 목요일’의 위기는 미국 정부와 연준(FRB)의 발 빠른 대응으로 곧 안정을 되찾았으나 실물시장은 그렇지 않았다. 금속과 원자재 값은 헌트 형제 투기사건 이후 20여년간 바닥권을 기었다. 헌트 형제는 은 투기로 1987년 파산했으나 나머지 헌트 가문 사람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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