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개혁론 넘어 해체론까지...위기의 전경련

잇단 정치적 행보에 정책 능력 부재...산은·기은도 탈퇴 검토

지난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군사정변 이후 대기업들의 친목단체로 태어난 전국경제인연합회(당시 한국경제인협회). 전경련은 산업화 시대와 외환위기 직후 빅딜(대규모 사업교환) 등을 주도하며 명실상부 국내 기업들의 대표단체로 자리매김해왔다. 많은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기업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목소리를 대신 내며 경제단체의 ‘맏형’으로 궂은일을 마다 하지 않았다. 전경련의 ‘정관 1조’에서는 ‘자유시장경제의 창달과 건전한 국민경제 발전’을 최고의 지향점으로 삼고 있고 이는 전경련 개혁론이 나올 때마다 스스로를 지탱해주는 ‘철학적 힘’이었다.


그런 전경련이 창립 55년 만에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국정교과서 논란과 보수단체 어버이연합에 대한 우회지원, 재단법인 미르·K스포츠의 출연금 모집 의혹 등 설립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잇따른 정치적 행보에 따른 추문 △재계 대표단체로서 정책적 수행능력 부재 △회장단 구성 문제에 이은 차기 회장 추대의 어려움 등 기능과 존립 여부에 대한 의구심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급기야 일부 기업회원들은 전경련 탈퇴를 검토하고 나섰다. 4일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과 권선주 기업은행장은 “전경련 (회원사) 탈퇴를 검토해보겠다”고 밝혔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행장들의 발언이 의례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 전경련의 최근 행보를 우려하는 회원사들이 적지 않다”며 “전경련이 환골탈태 수준의 조직혁신과 기능 재정립을 이뤄내지 못할 경우 탈퇴 회원사들이 속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더불어민주당이 이날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는 전경련의 순기능은 사라졌다”며 해체를 주장한 데 이어 진보(경제개혁연대)와 보수단체(국가미래연구원)까지 전경련의 존립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단순히 개혁론을 넘어 해체론까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셈이다.

과거 산업화와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전경련은 2000년대 들어 위상이 추락하며 무용론에 시달려왔다. 삼성과 현대자동차·SK·LG 등 주요 대기업 총수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발길을 끊으면서 회장단 회의도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있다. 서로 회장직을 고사하면서 허창수 GS그룹 회장이 3연임을 하고 있지만 내년으로 다가온 차기 회장 인선은 윤곽도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다. 전경련이 친목단체 수준으로 전락하면서 정부 정책 파트너는 대한상공회의소 몫이 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전경련이 각종 논란의 중심에 서자 회원사들의 불만도 비등해졌다. 일부 기업회원들을 중심으로 탈퇴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전경련에 대해 무용론에 이어 해체론이 대두된 데는 시대 흐름을 읽고 스스로 변신을 이뤄내기보다 과거로 역행하는 행보를 보인 것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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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은 196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정권의 정치자금 모집창구가 되고 그 대가로 국가 기간산업을 정부로부터 받아 회원사들에 할당하는 역할을 했다. 정경유착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전경련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집단이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을 위한 ‘빅딜’을 정부와 함께 추진하면서 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외환위기는 전경련의 위상이 빠르게 추락하는 분기점이 됐다.

당시 김우중 전경련 회장이 이끌던 재계 3위의 대우그룹이 해체된 것을 비롯해 수많은 대기업집단이 사라졌고 빅딜 과정에서 반도체 사업을 포기해야 했던 구본무 LG 회장은 전경련에 발길을 끊었다. 이후 전경련은 10대그룹 총수가 아닌 중견그룹 오너와 전문경영인이 회장직을 수행하다 2011년 허창수 회장이 취임했지만 후임자를 구하지 못해 3연임하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1990년대까지는 대기업들이 정부로부터 각종 특혜성 사업을 따내 기업 규모를 키울 수 있었기 때문에 전경련이 창구로서 위상이 탄탄했다”며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국내보다 글로벌 경쟁에 뛰어든 대기업들이 각개약진하면서 전경련의 역할도 그만큼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수용해 정부의 경제정책을 지원하고 기업들의 국제화를 뒷받침하는 싱크탱크로 변신해야 한다는 지적이 과거에도 있었으나 전경련이 현실에 안주하며 재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로서의 역할을 대한상의에 넘겨주고 말았다. 박근혜 정부 들어 대통령 초청 경제계 신년 인사회와 국회의원 환영 리셉션 등 재계 행사는 상의가 도맡아 주관하고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 김종인 전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초청강연 등 정치권과의 교류도 상의 몫이다.

이처럼 전경련의 위상이 급전직하하면서 외연 확장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본 게이단렌처럼 정보기술(IT)·엔터테인먼트 등 신산업 분야의 대기업으로도 문호를 확장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SM엔터테인먼트 등을 신규 회원사로 가입시켰으나 회장단은 여전히 문턱이 높다. 지난해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등 다수의 대기업 오너들이 신임 부회장으로 거론됐지만 이장한 종근당 회장이 새로 선임되는 데 그쳤다. 반면 대한상의는 지난해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이만득 삼천리 회장,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등 3인을 서울상의 부회장에 추가 선임하는 등 외연을 크게 넓히고 있다.

글로벌 경쟁이 격화되고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는 추세에 맞춰 정책 기능을 강화해야 하지만 이마저도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또 경제민주화와 규제 강화 등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정치권에 대응해 새로운 논리를 정립해 전달하기보다 과거의 논리만 답습하며 재계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역사교과서 국정화 과정에서 정부 입장을 적극 대변하고 보수우익단체인 어버이연합에 5억원 넘는 돈을 지원하는가 하면 청와대와 대통령 비선 실세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는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과정에서 모금 창구 역할을 하며 화를 자초했다.

재계는 전경련이 이번 기회에 기존 기능과 역할을 재정립하고 인적 쇄신 등을 통해 환골탈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체 수준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각종 의혹을 부인하며 문제를 덮기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당초 설립취지에 맞게 순수 민간 경제단체로서 새 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일본 게이단렌도 한때 정경유착의 핵심으로 지목되며 존폐 위기를 겪었으나 1993년 회장으로 취임한 히라이와 가이시 전 도쿄전력 회장이 정치헌금 알선 관행 폐지, 사회공헌활동 강화, 24개 상설위원회 설치를 통한 정책기능 강화 등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면서 정부 정책의 파트너로서 위상을 되찾았다”며 “전경련이 이 같은 혁신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더 이상 존재이유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행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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