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권한쟁의 남발하는 '무능 국회'

날치기 통과 등 정치권 내부 문제

자율적 해결 외면...法 의존 늘어

100건중 34건이 국회의원 청구

의장 상대 쟁의신청만 22건 달해

'정치의 사법화'로 이어질 우려



“헌법재판소가 국회 내부 문제에 개입하면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으려는 국회의원의 노력 대신 사법적 수단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헌재가 지난 5월 26일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을 둘러싸고 국회의원들이 국회의장을 상대로 제기한 권한쟁의 심판을 각하하면서 결정문을 통해 지적한 내용이다. 국회 안에서 해결해야 할 갈등을 권한쟁의나 법원 소송, 검찰 고소·고발 등으로 넘겨버리는 행태에 대한 제동이었다.


당시 헌재의 우려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최근 새누리당 의원들이 정세균 국회의장이 김재수 농림축산부 장관 해임안을 가결한 행위를 두고 헌재에 권한쟁의를 내자 ‘정치의 사법화’ 문제가 재현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치의 사법화는 국회 등 정치권이 핵심적인 정치 논쟁을 법원과 법관에 의존해 결론 내려는 시도를 말한다. 국회 스스로 문제를 풀지 못해 사법기관에 맡긴다는 의미다.



10일 헌재에 따르면 최근 새누리당이 정세균 의장을 상대로 낸 권한쟁의 심판은 1988년 헌법재판소가 설립된 이후 100번째로 청구된 권한쟁의 심판이다. 권한쟁의 심판은 법원이나 국회, 정부 등 국가 기관이 내린 처분 등이 서로의 권한을 침해할 수 있을 때 제기하는 헌법재판이다.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도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국가권력이나 지자체 사이의 권한 여부와 범위를 다투는 재판인 만큼 일반인들은 낼 수 없다.

법조계와 학계에서는 국회의원들이 권한쟁의 심판을 오남용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국회의원이 낸 대부분의 권한쟁의가 국회 내부에서 자율적인 해결을 외면하거나 정치적 목적으로 헌재에 넘긴다는 이유에서다.


헌재가 지난 1997년 ‘국회의원도 권한쟁의 청구 자격이 있다’는 판례를 낸 이후 국회의원의 청구가 이어져 전체 100건 가운데 34건에서 국회의원이 청구인이다. 이 가운데 국회의장을 상대로 낸 쟁의만 22건이다. 대부분 날치기 통과 등 국회 내부의 의사 진행 과정이 쟁점이다. 병합과 취하 등으로 현재까지 15건이 종결됐다. 차동욱 동의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는 이들 15건 가운데 단 3건을 제외하면 모두 정치의 사법화에 해당하는 사건이라고 분석했다. 차 교수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반복되면 사회적 갈등과 긴장관계를 입법정책으로 전환하는데 필요한 정당과 국회의 효능과 신뢰를 구조적으로도 약화할 수 있다”며 “정치의 사법화는 과도한 사법화나 제왕적 사법지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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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역시 정치권의 문제는 정치권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지난 5월 국회선진화법 결정문에서 헌재는 “만일 제도적인 미비가 입법교착 상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헌법 및 법률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제도개선을 함으로써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방법으로 입법의 잘못이나 결함을 스스로 바로 잡아야 한다”며 “국회의 다수파 의원들이 권한쟁의 심판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진성 헌법재판관은 올 초 같은 사건의 공개변론 현장에서 “세간에서 ‘동물국회를 막기 위해 국회선진화법을 통과시켰더니 식물국회가 됐다’는 말들을 하는데 동물·식물들이 들었으면 불쾌했을 것 같다”며 “동물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싸우지 않고 식물은 한자리에 있지만 성장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라며 국회의 무능과 무책임에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변론 당시 사건을 청구한 국회의원들은 국회선진화법을 ‘식물국회’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계속되는 지적에도 최근 국회의장을 상대로 한 권한쟁의가 제기되자 전문가들도 곱지 않은 눈초리다. 임지봉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재는 국회 관련 권한쟁의 사건에서 절차가 잘못됐더라도 법안 자체를 무효로 선언하지 않는 등 국회의 자율성을 존중해왔다”며 “이러한 경향과 사건의 기반이 되는 법률 등을 고려할 때 이번 청구는 낭비적이고 소모적인 정치공세로 전형적인 정치의 사법화 사례”라고 평가했다.

이와 달리 헌재가 스스로 정치적 판단을 한다는 비판도 있다. 헌재의 일부 판결이 오히려 사법의 정치화를 부추긴다는 얘기다. 법안 날치기 통과가 권한쟁의로 이어진 과거 사건에서 ‘장내 소란’을 핑계로 절차를 생략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을 허용했다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학계에서도 문제의 1차적 책임은 정치 집단에 있다는 의견이 대체적이다. 임 교수는 “권한쟁의 심판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는 만큼 신속하고 효율적인 방법은 없다”며 “국민의 손으로 뽑힌 국회의원들 스스로 밤샘토론을 통해서라도 직접 갈등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갖고 나서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김흥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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