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중공, UN 가입





극히 대조적인 사진 두 장이 있다. 침통과 박장대소.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민족 간에 일어난 일이다. 다른 것은 단 두 가지. 국가와 표결 결과였다. 중공(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자유중국(대만)을 대신해 국제연합(UN)의 회원국으로 들어왔다. 1971년10월25일 밤 미국 뉴욕 UN 본부에서 열린 제1967차 유엔 총회는 중국과 대만의 희비를 갈랐다. 미국도 허를 찔렸다. 중공의 UN 가입을 좀 더 늦출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표 대결을 앞두고 가장 분주하게 움직인 인물은 조지 부시 UN 주재 미국 대사. 대중 관계를 개선해 나간다는 방침에도 중공의 UN 가입을 시기 상조라고 여기고 있던 상황. 부시 대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놀랐다. 10년 전 미국 주도로 마련된 ‘중요사항 지정방식(important question formula)’이 먹히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중요사항 지정방식이란 중국의 대표권 변경에 대해서는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가능하다는 조항. 한 마디로 중공을 막기 위한 방패였다.

제3세계 비동맹국가 회원국의 증가로 방어막이 뚫릴 수 있다고 본 미국은 새로운 제안을 내놨다. 자유중국을 쫓아내는 데도 찬성 3분의 2 이상을 넘겨야 한다는 것. 부시 대사가 꺼낸 ‘역(逆)중요사항 지정방식’은 논란과 연이은 표결 끝에 55대59로 부결되고 말았다. 바로 뒤 알바니아가 제안한 ‘중공의 가입 승인 안’에 대한 표결이 이어졌다. 자유중국 대표단은 표결 시작 직전에 탈퇴 성명을 발표하고 UN을 떠났다.

자유중국 대표단이 떠난 가운데 진행된 중공 가입 건에 대한 UN 총회 투표 결과는 찬성 76에 반대 35, 기권 17. 불참 3. 기준선인 3분의 2를 넘었다. 중공 대표단의 환호가 바로 이때 터졌다. 중공은 서방 진영의 표도 적지 않게 얻었다. 영국과 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벨기에·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멕시코에 캐나다와 이스라엘까지 중공 편을 들었다. 미국의 편에 설 것이라고 기대했던 아르헨티나와 스페인·그리스·룩셈부르크.태국도 기권표를 던져 결과적으로 중공을 도왔다. 부시 대사는 중국에 국한해 1국가 2대표를 인정하자는 긴급제안을 내놓았으나 자유중국 스스로 탈퇴를 선언하는 통에 효력을 잃었다.


서방 진영은 왜 중공 가입에 찬성했을까. 영국은 홍콩의 지위에 대해 중공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는 형편. 미국도 사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른 국가들은 이탈의 명분을 미국의 태도에서 찾았다. 미국은 UN총회 개막 5개월 전인 1971년 4월 중공에 탁구대표단을 보내 ‘핑퐁 외교’를 선보이고 두 달 후인 6월에는 대중공 무역 금지조치를 풀었다. 각국은 이를 경제적 기회로 여겼다. 결국 UN에 의해 ‘한국전쟁의 침략자’로 규정됐던 중공은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까지 꿰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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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탄식이 나왔다. 백두진 당시 국회의장은 한 신문 기고문에서 ‘형사 피고인이 재판장 석에 앉게 됐다’고 썼다. 한국에서 ‘위기를 넘기려면 국민 총화 단결 밖에는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각국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중공 가입에 반대표를 행사했던 일본이 약삭빠르게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입장을 밝혔다. 서방동맹국들이 표결에서 이탈하는 명분을 제공했던 미국도 시기만 늦췄을 뿐 보다 확실하게 중공과 손잡았다. 1972년2월, 중공을 전격 방문한 닉슨 대통령은 마오저뚱, 저우언라이 등과 연쇄 회담을 갖고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선언의 핵심은 ‘중공이 중국을 대표하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점. 대만에 주둔한 미군과 군사시설 철수에 의견을 모았다. 자유중국은 미국에 대한 배신감에 떨었다. 미국의 대통령이 한 국가에 무려 일주일을 머물며 협상한다는 일정 자체부터 파격이었다. 결국 중공은 UN 가입과 상하이 공동성명을 통해 국제 무대로 완벽하게 복귀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수교국 수를 늘리고 UN 회원국으로 인정받으려 노력한지 10여년 만의 결실. 문화혁명의 공백기를 감안하면 국제무대 등장을 추진하자마자 뜻을 이룬 셈이다.

양국이 구원을 털고 손 잡은 이유는 두 가지.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과 경제난 탓이다. 미국은 끝없이 돈이 들어가는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는 데 중공의 협조가 필요했다. 소련에 대한 포위망 구축에 중공을 끌어들이고도 싶었다. 중공도 마찬가지. 안보위협 요인인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세계 인민의 적’으로 규정했던 미국과 손을 잡았다. 상하이 공동선언은 얄타회담 이후 고착된 미국과 소련 양극이 주도하는 냉전체제를 다극체제로 변화시켰다. 중공의 국제사회 진입도 더욱 빨라졌다.

중공의 UN 가입 45주년. 한중수교(1992) 이후 ‘중공’이라는 호칭 대신 ‘중국’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대륙은 기회였으며 미래의 위기다. 지난 4반세기 동안 한국 경제가 이렇다 할 혁신이나 기술 개발 없이 이만큼 성장한 것은 중국이라는 초고속열차에 탑승한 기호지세(騎虎之勢)의 힘이었다. 중국의 성장이 둔화하고 세계경제 무역도 축소되는 가운데 이젠 갈등이 주로 부각되는 분위기다.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지는 우리의 자주적 의지에 달렸다.

중국도 세계 2위의 강대국으로 책임을 져야 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UN에 발들일 때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던 약속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크고 작은 나라는 모두 평등하며 한 두 초대국(超大國:초강대국)이 움직이는 것에 반대한다. 각국은 연안해역 및 해저자원을 민족 경제로 개발할 권리가 있다. 공해는 세계 각국 인민의 공동 소유로 한 두 초대국의 조종과 독점을 용납하지 않는다. 해양은 군사침략정책을 위해 활용될 수 없다. 중국은 타인을 침략, 전복, 지배, 간섭, 무시하는 초대국이 되지 않으며 장래에도 영원히 되지 않는다.’ 한국은 물론 세계 어족 자원의 씨를 말리고 중화 민족주의로 주변국을 압박하는 중국에 묻고 싶다. 대국 굴기를 넘기 우주 굴기에 나서다 보니 45년 전 다짐을 버리고 싶어졌는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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