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무스탕 전투기의 경제학





1위 그리고 8위. 무스탕 전투기가 갖고 있는 기록이다. 1위라는 평가는 디스커버리 채널이 매겼다. ‘역사상 가장 우수한 전투기 10종’을 방영하며 무스탕을 1위에 올렸다. 8위라는 기록은 생산량 기준이다. 1940년 말부터 1951년까지 누적 생산량 1만5,586대. 제트전투기가 등장한 이후에도 계속 생산됐다는 점은 성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얘기다. 다만 그 탄생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애초에는 2선급 전투기로 설계됐다. 미군은 아예 쳐다 보지도 않았다.


신형 전투기 개발을 의뢰하고 ‘무스탕(Mustang)’이란 이름을 붙인 나라는 영국. 전운이 짙어지자 전투기 생산을 늘린 영국은 한계에 맞닿았다. 스피드파이어와 허리케인이라는 우수한 전투기를 생산, 보유했으나 생산능력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 것. 영국은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독일과 전쟁에 들어가기 전부터 미국 커티스사와 P-40 토마호크 전투기 수입 계약을 맺었다. 영국은 더 많은 물량을 요구했으나 커티스사는 여력이 없었다. 세계 각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주문을 맞추려 생산라인이 풀 가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영국은 노스 아메리칸 항공사를 찾았다. 영국과 영연방국가들이 훈련기 겸 대지 지원용으로 사용하는 T-6 하바드기(6.25 전쟁 발발 이전 국민성금으로 도입한 건국기 T-6 택산과 동일한 기종)를 생산하는 노스 아메리칸 항공(NAA)에 P-40 전투기의 면허 생산을 의뢰한 것. 커티스사의 하청 방식으로 생산라인을 돌리자는 제의였다. 여기서 노스 아메리칸은 실로 대담한 역제안을 내놓았다. ‘P-40보다 나은 전투기를 8개월 안에 개발, 납품할 수 있다.’

영국은 믿기지 않았어도 워낙 다급했던 터. 1940년 5월말 단서를 달아 역제안을 받아들였다. 영국이 내건 조건은 가혹했다. ‘4개월 안에 신형 전투기를 개발해 시험 비행을 마칠 것. 신형기의 성능이 P-40보다 아래인 경우 계약은 자동 취소.’ NAA사는 신형전투기 생산 개시 후 매달 50대씩 320대를 납품하기로 계약했다. 총 가격 1,474만6,964 달러로 대당 4만6,0 84달러. 회사의 명줄이 달린 신형기 개발 프로젝트에 매달린 NAA는 불과 117일 만에 사제기 NA-73X를 만들어냈다.

이윽고 첫 시험비행일인 1940년10월26일.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리스 해군비행장(오늘날 로스엔젤리스 국제공항)에서 NA-73X는 5분을 날았다. 다음달 13일까지 누적 3시간30분을 비행한 NA-73X는 영국 평가단을 매료시켰다. 최대 장점은 속력. 최고 시속 620㎞로 같은 엔진을 쓰는 P-40 전투기보다 시속 40㎞ 빨랐다. 11월20일 시험비행에서 기체가 추락했으나 영국은 오히려 주문을 320대에서 620대로 늘렸다.


영국은 인수받은 전투기에 무스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더욱 정밀한 테스트에 들어갔다. 당초에는 2선급 전투기나 대지공격용으로 사용할 생각이었으나 예상보다 성능이 좋아 1선급 전투기로 활용하기로 마음먹은 영국은 곧 이상을 찾아냈다. 고공(高空)에서 무스탕Mk Ⅰ의 비행 성능이 현저히 떨어졌던 것. 영국은 별 수 없이 무스탕의 임무를 정찰과 대지공격에 국한시켰다. 막상 무스탕에 오른 영국 조종사들은 성능에 만족했다. 영국에서 독일까지 오갈 수 있는 장거리 비행 능력은 그 어떤 전투기도 따라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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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공군의 극찬에 놀란 미육군항공대(미 공군의 전신·미 공군은 1947년에 독립)도 시험 끝에 이 전투기를 대지 공격용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하고 A-36 아파치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국도 이를 도입해 무스탕 MkⅡ이란 제식명을 붙여 저고도 전투나 대지 공격기로 썼다. 전투기 한대가 아쉬웠던 영국은 무스탕의 개량에 나섰다. 미국제 엔진을 떼어내고 영국제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단 무스탕은 놀라운 기록을 쏟아냈다. 프로펠러까지 개량해 최고 속도가 시속 700㎞ 이상으로 높아졌다. 장점이던 장거리 비행능력도 획기적으로 뛰었다. 1,000㎞였던 항속거리가 보조연료 탱크를 달았더니 2,755 ㎞까지 늘었다.

미 육군항공대도 영국이 개량한 무스탕Ⅲ에 P-51B라는 이름을 붙이고 대뜸 2,200여대나 주문했다. 대량 주문 이유는 장거리 폭격기의 호위전투기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독일 지역을 공습할 때마다 마땅한 호위전투기가 없어 11% 손실률(격추율)을 기록했던 폭격기들은 P-51 무스탕이 등장한 뒤부터 안심하고 독일 지역을 두들겨 팼다. 쓰임새가 많아지며 개량 요구도 늘어나 무스탕은 다시금 대규모 개량을 받았다. 막혔던 후방 시야 확보를 위해 동체를 깎고 눈물방울형 캐노를 달았다. 기관총도 6정으로 늘려 무스탕 전투기는 12.7㎜ 기관총탄 1,080~1,800발을 실었다.

기관총탄을 잔뜩 탑재한 P-51D(영국명 무스탕 MkⅣ)는 유럽의 하늘을 지배했다. 2년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무스탕이 격추한 독일기만 4,950대. 지상 파괴 4,131대까지 합치면 9,000대가 넘는 독일 군용기가 무스탕에게 당한 셈이다. 무스탕은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31개 국가에서 전투기로 쓰였다. 호주에서는 일부 면허생산도 이뤄졌다.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소련에도 미국과 영국이 공급해 독일 지상군 공격 임무에 투입됐다. 중화인민공화국, 즉 중공도 39대를 운용한 기록이 있다. 자유중국(장개석의 국민당군·대만)에 제공된 무스탕 전투기가 노획, 귀순을 통해 중공에 넘어간 것이다. 우리나라 공군도 6.25 전쟁기에 133대를 받아 1960년대 초까지 운용했다(한국 공군 최초의 무스탕 조종사가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 신 전공군참모총장이다).

단 4개월 만에 개발한 사상 최고의 명품 전투기 무스탕의 시험비행 76주년. 세상은 많이도 변했다. 6년간의 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 연합국은 63만7,248대, 주축국은 22만 9,331대의 군용기를 각각 생산해냈다. 미국의 생산량은 약 324,000대. 연합국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미국에서 나왔다. 당시 미국의 항공기 공장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용접하고 리벳을 조였다. 무스탕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 생산된 군용기다. 노동자 수십만명이 단가 5만 달러를 넘지 않는 전투기 수만여대를 만들며 삶을 영위한 셈이다.

오늘날은 딴판이다. 웬만한 성능을 지닌 전투기는 대당 가격이 1억 달러를 쉽게 넘는다. 각종 센서류와 무장까지 합치면 3억 달러에 이르는 기체도 있다. 우리나라도 18조원을 들여 한국형 전투기(KF-X) 180대를 생산 배치할 계획이다. 고가격 고성능 전투기는 고성능 기계나 소수의 고임금 엔지니어들이 제작한다. 예전보다는 가격도 높고 고용 효과도 떨어진다. 전투기에서도 소수가 부를 독점하고 소수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고도기술사회의 그늘이 보이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하늘을 비워둘 수도 없고…. 인간이 무기개발 경쟁이라는 쳇바퀴를 탄 다람쥐와 뭐가 다른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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