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현대상선, 한국 해운업 부활의 키를 쥐다

‘원톱 국적선사’의 부활 몸부림…향후 순항 여부에 관심 집중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위치한 현대상선 본사 사옥.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위치한 현대상선 본사 사옥.


현대상선의 40년 역사에서 지난 1년 여 시간은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국내 최초의 국적선사는 유동성 위기로 인한 법정관리 문턱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살 길이 열렸다고 보긴 아직 이르다. 아직 꺼지지 않은 해운 위기의 불씨가 채 상처가 아물지 않은 현대상선에게 국적선사로서의 막중한 책무를 떠안기고 있다. 현대상선은 이 책임의 무게를 견디고 다시 순항할 수 있을까?

지난 5월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현대그룹 사옥에는 긴장감과 적막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현대상선 회생의 가장 큰 분수령이 될 용선료 협상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현대상선의 협상 목표는 단 하나였다. 무조건 용선료를 인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용선료란 배를 빌리고 배 주인에게 지불하는 돈을 의미한다. 지난해 기준 현대상선이 해외 선주들에게 빌려 사용하고 있는 배는 총 83척, 용선료는 약 9,800억 원 수준이었다.


현대상선은 용선료 협상팀을 꾸려 지난 2월부터 3개월 간 22개 해외 벌크선사들과 용선료 인하를 위한 협상을 진행해온 터였다. 당시 현대상선은 남은 계약 기간 용선료를 20~30% 깎는 대신 인하분의 절반가량을 현대상선 주식으로 출자 전환하고 나머지는 경영정상화 이후 발생할 수익을 통해 현금으로 보상하겠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당시 업계에선 협상의 성공 가능성에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물론 현대상선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용선료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선주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패의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익명을 요구한 해운 담당 증권사 애널리스트 A 씨는 말한다. “사실 해외 선주들 입장에선 현대상선의 용선료를 인하해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는 않습니다. 해외 선주들의 용선 거래량 가운데 현대상선이 차지하는 비중이 한자릿수일 정도로 극히 미미하기 때문이죠. 문제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글로벌 선사들이 현대상선의 사례를 빌미로 용선료 인하 요구를 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어요. 설사 현대상선이 법정관리 상태에 놓여 용선료를 단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된다 해도 나머지 대다수 글로벌 선사들의 용선료 인하 규모보단 금액이 적기 때문에 협상 결렬 가능성도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오히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현대상선이었다. 주 채권단인 산업은행에선 “용선로 인하 협상에 실패하면 법정관리가 불가피하다”며 사실상 ‘최후통첩’을 보낸 상황이었다. 반드시 협상에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현대상선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현대상선의 4,600TEU급 컨테이너선 ‘현대 유니티호’.현대상선의 4,600TEU급 컨테이너선 ‘현대 유니티호’.


현정은 회장의 이메일과 용선료 협상
다행스럽게도 대다수 벌크선 선주들은 현대상선의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일부 선주들이 용선료 인하에 난색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은 현대상선 연간 용선료의 70% 이상을 가져가는 컨테이너선 선주들이었다. 이들이 용선료 인하에 반대한다면 현대상선의 법정관리는 기정사실화 될 수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현대상선은 직접 선주들을 회사로 초청했다. 절박한 상황을 설명해 협상을 반전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현대상선이 협상해야 했던 선주는 총 5곳이었다. 하지만 이날 협상 테이블에 앉은 해외 선주는 그리스의 다나오스와 나비오스, 캐피털십매니지먼트(CCC) 세 곳 뿐이었다. 싱가포르 국적 선사인 EPS는 화상 컨퍼런스 콜을 통해 협상에 응한 상황이었다.

협상에 응하지 않은 업체 한 곳은 영국의 조디악이었다. 현대상선은 지난 5월 기준 조디악으로부터 10척의 컨테이너선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었다. 현대상선이 용선 계약한 전체 컨테이너선 38척 중 가장 많은 TEU(20피트 길이의 컨테이너) 물량을 책임지는 선주가 바로 조디악이었다. 거대 선주가 빠진 협상이 제대로 굴러갈 리 없었다. 4시간 가까이 진행된 마라톤 협상은 그렇게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협상에 참석했던 정용석 산업은행 부행장은 “용선료 협상이 어려움을 겪게 됐다”며 아쉬움을 드러냈고, 한국을 찾은 선주들 역시 협상에 대한 별다른 언급 없이 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모든 상황은 현대상선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자칫 법정관리라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때 움직인 이가 바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었다. 이미 그룹의 품에서 떠난 회사였지만 현 회장에게 현대상선은 여전히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야 했다. 현 회장은 조디악의 에얄 오퍼 회장에게 한 통의 이메일을 보냈다. 이메일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조디악은 과거에도 현대상선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힘을 빌려준 든든한 친구였습니다. 비록 저는 대주주에서 물러나지만, 현대상선의 회생을 위해 다시 한번 도움을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진심이 담긴 현 회장의 메일 한통은 오퍼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조디악이 협상 테이블에 앉기로 방향을 틀었다. 이후 협상은 다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6월 현대상선 회생의 가장 큰 중대 고비였던 용선료 인하 협상이 타결됐다. 현대상선은 향후 3년 여 동안 지급 예정인 용선료 약 2조5,000억 원 중 5,300억 원을 신주 및 장기 채권으로 지급하게 됐다. 회사 정상화에 필요한 5,300억 원의 현금을 확보한 셈이었다. 그리고 부활의 신호탄을 쏜 현대상선은 본격적인 정상화를 위한 전략 마련에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2년 만에 친정으로 컴백한 유창근 현대상선 사장이 있었다.




오랜 진통 끝에 용선료 협상이 마무리되면서 현대상선은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용선료 협상에 참여한 김충현 현대 상선 부사장(왼쪽)과 현대상선 측 마크 워커 변호사(오른쪽)오랜 진통 끝에 용선료 협상이 마무리되면서 현대상선은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용선료 협상에 참여한 김충현 현대 상선 부사장(왼쪽)과 현대상선 측 마크 워커 변호사(오른쪽)


구원투수로 친정 복귀한 유창근 CEO
용선료 협상을 마친 현대상선은 채권단이 요구한 ‘회생 3대 조건’ 충족을 위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미 용선료 협상 이전 채무재조정에 성공한 현대상선은 남은 전제조건인 글로벌 해운동맹 ‘2M(글로벌 1, 2위 해운사인 덴마크의 머스크와 스위스의 MSC가 주도하는 세계 최대 해운동맹)’ 가입에 사활을 걸었다.

자연스럽게 회생의 마지막 퍼즐 맞추기를 진두지휘하는 유창근 사장의 경영전략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현대상선의 구원투수로 지난 9월 신임 사장에 취임한 유 사장은 국내 해운업계의 대표적인 컨테이너 전문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현대상선은 유 사장의 ‘친정’격인 회사다. 지난 1986년 현대상선에 입사한 유 사장은 이후 구주본부장, 컨테이너사업부문장, 현대상선 자회사인 해영선박의 대표이사를 거쳐 지난 2012년부터 2년 여 간 현대상선 대표이사를 역임한 바 있다.

하지만 유 사장의 복귀가 확정되자 대다수 업계 관계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역시 현대상선의 부실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유 사장이 처음 현대상선 대표직에 오르기 전인 2011년 현대상선의 적자는 5,000억 원 수준이었다. 하지만 유 사장이 대표직에서 물러난 2013년에는 적자가 오히려 늘어나 1조 원 수준에 육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채권단은 신임 사장 선임과정에서 컨테이너 전문가 유창근 사장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현대상선 전체 매출의 약 80%가 컨테이너 부문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컨테이너 사업의 경쟁력 강화에 유 사장 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의견이 채권단 내부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특히 유 사장은 최초의 민간기업 출신 인천항만공사 사장으로 재직하며 인천신항 컨테이너 부문 경쟁력 강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경력을 갖고 있었다. 인천항의 숙원사업이었던 인천-미주 간 원양항로를 개설하고, 컨테이너 물동량을 꾸준히 늘린 것도 그의 업적이었다.


채권단은 그가 과거 현대상선에 몸담았던 당시 성과가 좋지 않았지만, 이를 글로벌 해운업계 불황의 여파로 해석했다. 그는 해운업계 불황 타개를 위해 북미, 유럽, 남미 등 전세계를 돌며 활발한 현장경영을 펼쳤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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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업계 관계자 B 씨는 말한다. “채권단도 처음에는 외국인 CEO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는 것이었죠. 실제로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외국인을 포함해 최고의 전문가를 모셔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역시 국내 전문가였습니다. 국적선사에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 대표로 부임할 경우, 자칫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이유였죠. 특히 현대상선은 터진 상처를 봉합해 아물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현대상선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죠. 유 사장은 바로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었어요. 추락한 해외 선주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그들과의 교감이 매우 중요한데, 유 사장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바로 글로벌 경영을 통해 다져온 인적 네트워크였거든요. 그런 능력도 유 사장 선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일각에선 유창근 사장 내정 과정에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입김이 일정 부분 작용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해운업계 가문에서 나고 자란 현 회장이 현대상선의 재인수를 노리고 자신과 함께 일해본 유 사장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하나의 설에 불과하다.

친정에 복귀한 유창근 사장 앞에는 현재 수많은 난제가 산적해 있다. 글로벌 해운업계의 불황이 여전해 국내 유일의 국적선사로서 반전을 꾀하기 위해선 ‘선장’ 유창근 사장의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결코 녹록지않다. 당장의 실적개선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현대상선은 올해 상반기에만 4,170억 원의 적자를 냈다. 지난 2분기까지 5분기 연속 적자를 낼 정도로 돌파구가 안 보이는 상황이다. 더구나 현대상선은 지난 2013년부터 유동성 확보를 위해 액화천연가스(LNG) 사업부, 벌크전용 사업부, 부산신항 터미널 지분 일부 등을 매각해왔다. 알짜사업 대부분을 팔아버린 탓에 당장 수익이 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컨테이너 부문이 유일한 상황이다. 컨테이너 전문가인 유 사장이 과연 어떤 전략으로 주력 사업인 컨테이너 부문에서 실적 개선의 실마리를 찾을지 주목되는 이유이다.

또 자산매각에 돌입한 한진해운의 사업 인수 역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부분이다. 현재 정부는 법정관리 중인 한진해운의 주요 자산을 현대상선이 인수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국내 해운업계 경쟁력 약화를 막기 위해선 사실상 유일한 국적선사인 현대상선이 한진해운 자산을 인수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핵심적으로 보아야 할 부분은 역시 한진해운 연간 매출의 절반 가량을 차지했던 미주노선이다. 법정관리 이전 한진해운의 미주노선 점유율은 세계 6위에 해당하는 7% 수준이었다. 겉으로 보면 한진해운 미주노선 영업망의 인수가 현대상선의 재기에 큰 힘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유 사장과 현대상선은 한진해운의 미주노선 입찰 참여를 결정한 상태다. 다만 실제 인수로 이어질 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법정관리 이후 한진해운의 미주노선 점유율은 사실상 ‘0%’에 수렴하고 있다. 한때 5조 원 수준으로까지 평가받았던 미주노선의 가치는 현재 1,000억 원대로 추락해있다. 무엇보다 한진해운과 거래했던 화주들을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을지가 불투명하다. 해운업계 관계자 B 씨는 말한다. “컨테이너선의 글로벌 경쟁력은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을까요? 방대한 물동량? 광범위한 네트워크? 둘 다 아닙니다. 바로 ‘신뢰’입니다. 그런데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로 한국 선사에 대한 미주노선 해외 화주들의 신뢰가 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현대상선이 인수할 수 있는 건 유형자산인 노선과 선박 뿐인 상황이죠.”

오히려 현대상선은 미주노선보다 초대형 선박 인수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보다 많은 양의 컨테이너를 적재할 수 있는 초대형 선박을 운용하면 장거리 노선에서 원가를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4월로 예정된 글로벌 해운동맹 2M과의 공동운항을 통해 노선 및 영업력 확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도 현대상선에겐 초대형 선박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2M에 속해있는 머스크와 MSC의 주력 선박은 대부분 1만 8,000~1만 9,000TEU 급의 초대형 선박이다. 반면 현대상선 소유한 가장 큰 선박은 1만 3,100TEU 급이다. 게다가 그 숫자도 5척에 불과하다. 현재 매물로 나온 한진해운 미주노선의 선박은 평균 6,500TEU 규모로 현대상선의 니즈와 맞지 않는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한진해운의 미주노선 인수기업은 빠르면 11월 중순께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에 따라 한진해운이 소유하고 있는 초대형 선박 매각절차가 빠르면 12월 초부터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시 도전하는 현대상선
현대상선은 국내 최초의 해운회사다. 1976년 고 정주영 회장이 유조선 3척으로 설립한 현대상선은 이후 다수의 인수합병과 국내외 터미널 인수를 기반으로 꾸준히 성장을 거듭해왔다. 물론 그 사이 우여곡절도 많았다. 설립 후 40년 동안 대주주만 3번 바뀌었고, 2000년대 소위 ‘왕자의 난’을 시작으로 수 년 간 이어진 현대가 경영권 분쟁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다.

이러한 굴곡 속에서도 현대상선은 꿋꿋이 국적선사로서의 책임을 다해왔다. 그리고 지난 40년간 이어진 국적선사 양대구도는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로 인해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제 현대상선은 40여 년 전 정주영 창업주가 그랬듯, 국내 해운업계를 홀로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책무를 부여받고 있다.

이미 현대상선에선 발 빠른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유창근 사장은 조기 경영정상화를 위해 취임 직후부터 특유의 ‘현장경영’에 시동을 걸고 있다.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로 인한 화주들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4,000~6,000TEU 급 컨테이너선 5척을 미주노선에 투입하기도 했다.

과연 현대상선은 홀로 남은 국적선사라는 막중한 책임의 무게를 견디고 경영 정상화, 나아가 한국 해운업계의 위상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현대상선이 다시 무게중심을 잡고 순항을 할 수 있을지 여부에 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김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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