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은 올해 포춘코리아 500 리스트 26위에 올랐다. 지난해보다 매출액은 10%가량 줄었지만 당기순이익은 32% 증가했다. 내실 있는 장사를 했다는 뜻이다. 최근 LG화학은 사업구조 다각화에 힘을 쏟고 있다. 국제유가 불안과 경기침체로 석유화학 사업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LG화학은 바이오 사업에 진출하는 한편 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지난 9월12일 LG화학과 LG생명과학은 각각 이사회를 열어 합병을 결의했다. 두 회사는 오는 11월28일 각각 합병승인 이사회(LG화학)와 합병승인 주주총회(LG생명과학)를 거쳐 내년 1월1일자로 합병을 완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LG화학과 LG생명과학의 합병은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의지로 결정됐다. 삼성그룹, SK그룹 등이 미래 신성장동력의 하나로 바이오·제약 사업을 키우고 있는 것이 자극이 되었다. 사실 LG그룹은 삼성그룹이나 SK그룹보다 일찍 바이오·제약 부문에 진출해 오랜 기간 탄탄한 내공을 쌓아왔다. LG생명과학은 2002년 8월 ㈜LG의 생명과학 사업 부문이 분할돼 설립된 회사다. 2003년 항생제인 ‘팩티브’가 국내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획득하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꾸준하게 연구·개발(R&D)에 투자하며 규모를 키웠지만 영업실적이 쉽게 개선되지 않아 그룹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지난해 LG생명과학의 매출액은 4,505억 원으로 국내 제약사 중 10위권에 머물고 있다.
정보라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LG생명과학은 과거 신약개발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회사였지만 지난 2002년 ㈜LG에서 분사한 이후 R&D 투자동력을 잃었다” 며 “수익 창출이 없는 상태에서 장기간 대규모 투자를 지속해야 하는 바이오 사업 특성상 LG화학의 현금창출 능력과 자본력은 LG생명과학의 신약개발과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LG화학은 LG생명과학과의 합병 발표 이후 “글로벌 신약을 개발해 바이오·제약 분야를 선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지난해 매출 20조2,066억 원, 영업이익 1조8,236억 원으로 투자 여력이 충분한 LG화학은 R&D와 생산시설 등에 공격적으로 투자해 바이오·제약 사업 속도와 규모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것으로 보인다.
LG화학은 바이오 신약, 바이오시밀러(생물의 세포나 조직 등의 유효물질을 이용해 제조하는 바이오의약품의 복제약), 차세대 백신 개발 등을 위해 매년 3,000억∼ 5,000억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해외 사업도 본격 육성해 현재 45% 수준인 해외 사업 비중을 60% 이상으로 높일 예정이다.
LG생명과학 합병에 담긴 미래 청사진
LG화학은 충북 청주에 있는 LG생명과학 오송공장에 2020년까지 약 1,000억 원을 투자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미 지난 9월 기존 오송공장 1·2동 외에 ‘오송공장 3동’을 새로 지었다. 현재 오송공장은 일반 바이오의약품 기준으로 시간당 3만6,000여 개를 생산할 수 있는 대량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를 위한 자동화 시스템도 구축돼 있다.
바이오의약품은 균을 다루기 때문에 오염 가능성을 차단하도록 빠른 시간에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바이오의약품은 그 특성상 공정 과정에서 단 하나의 균이라도 잘못 들어가면 모든 물질을 버려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 때문에 생산된 제품은 탱크에서 세척된 후 다시 멸균 작업을 거친다.
오송공장 3동은 2,115㎡ 규모에 2개 층으로 건설됐다. 이곳은 국내 최초로 고·중·저위험군의 모든 병원균을 다룰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에볼라 바이러스나 에이즈처럼 고위험군의 질병 치료제가 개발되면 이곳을 통해 어느 제약회사보다 발 빠르게 생산에 들어갈 수 있다. 중위험군 시설의 경우 지진이나 각종 사고에도 균이 빠져나가지 않을 수 있도록 작업장 벽을 특수패널로 지었다. 고위험군 시설은 특수패널 벽 바깥으로 두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두고 튼튼한 콘크리트 벽이 또 감싼다. 바깥 공간의 기압은 항상 안쪽 공장보다 높게 설정돼 위험물질이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조절된다.
LG화학 관계자는 “오송공장은 미래 백신, 바이오시밀러, 바이오 신약 등 주로 미래 사업 준비를 하고 있는 곳으로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해 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GMP) 인증 기관인 세계보건기구(WHO)의 인증을 지난 2월 받았다”며 “그룹 계열사인 LG전자의 정보기술(IT)도 접목해 전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미래 경쟁력을 갖춰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LG화학은 지난 4월 동부그룹에서 종자·농화학 기업인 팜한농을 4,245억 원에 인수하며 그린바이오 사업에도 발을 들여놨다. 그린바이오는 생명공학이 농수산업 분야에 응용된 개념이다. 가공되지 않은 1차식품에 바이오 기술을 가미해 기능성소재와 식물종자, 첨가물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LG화학은 팜한농의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3,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바이오 분야 진출을 위해 팜한농에만 모두 7,000억 원이 넘는 자금을 쏟아 부은 상황이다.
글로벌 화학기업들 역시 화학에 바이오를 접목시킨 생명과학 사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글로벌 20대 화학기업(2014년 매출 기준) 중 종합화학기업 8곳이 생명과학 사업에 발을 담근 상태다. 독일 바스프와 미국 다우케미칼, 일본 미쓰비시화학 등은 생명과학 사업 매출 비중이 10~20%에 이른다.
이제 국내 기업 입장에서도 바이오 사업 투자는 필수로 여겨진다. LG화학 관계자는 “제조업 중심인 대기업 사이에선 새로운 먹거리 확보가 어렵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신성장동력 확보를 고민하는 대기업이라면 바이오 사업 강화는 당연한 선택이다”라고 말했다.
바이오 사업은 상대적으로 경기변동에 민감하지 않다.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는 시점부터는 안정적인 현금 창출을 기대할 수도 있다. 황규원 유안타증권 애널리스트는 “LG화학은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통해 경기변동에 따른 실적 변동 위험을 줄여나갈 수 있다”며 “장기적으로 석유화학 부문의 이익 변동성을 상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LG화학은 2025년까지 전체 매출에서 바이오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10%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석유화학과 2차전지에 이어 바이오 사업을 통해 세계 5위 화학회사로 도약한다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국내외 기업의 추가 인수합병도 점쳐진다. LG화학 관계자는 “국내외 기업 대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기회를 보고 있다”며 “그린바이오 분야에서도 해외 업체와의 합병 혹은 파트너십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구본무 회장이 직접 챙긴 전기차 배터리 ‘세계 1위’
LG화학은 LG생명과학과의 합병과 함께 전기차 배터리에 대한 투자도 공격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LG화학은 지난 10월5일 폴란드에 4,000억 원을 투자해 유럽 최대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착공했다. 폴란드 남서부 브로츠와프 인근 코비에르지체에 위치한 ‘LG 클러스터’ 안에 축구장 5배 크기인 4만1,300㎡ 규모로 짓는다. 이곳에는 유럽 현지 고객사의 요청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전극부터 배터리팩까지 모두 생산하는 완결형 생산체제를 구축한다. 2018년 말경에는 320km 이상 주행이 가능한 고성능 전기차 배터리를 연간 10만개까지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LG화학은 폴란드 공장을 발판 삼아 급성장하는 유럽 전기차 배터리 시장 선점에 나설 계획이다. 2030년 약 277만대 규모로 증가할 것으로 기대되는 유럽 전기차 시장에서 LG화학은 볼보, 벤츠, 르노, 아우디 등 다수의 고객사를 확보하고 있다. LG화학은 폴란드 공장 건립을 통해 유럽 내 수주 물량이 늘어나는 데 따른 규모의 경제성을 확보하고 지리적 이점에 따른 물류비 절감효과를 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LG화학은 폴란드 공장이 완공되면 한국의 오창, 미국의 홀랜드, 중국의 난징, 폴란드 브로츠와프로 이어지는 동종 업계 최다 글로벌 생산거점을 완성하게 된다. LG화학은 전기차 시장의 약 90%를 차지하는 미국, 중국, 유럽 3곳에 생산거점을 구축한 전 세계 유일의 업체로 글로벌 시장 선점을 위해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LG화학 관계자는 “미국, 중국, 폴란드 공장은 현지에서 수주한 물량을 공급하고 국내 오창공장은 국내 수주 물량 생산과 함께 전체적인 글로벌 물량 조절기능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향후 급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메릴린치는 올해 7월 낸 보고서를 통해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 지난해 110억 달러 규모에서 2020년 320억 달러 규모로 약 3배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배기가스 배출과 연비 규제가 강화되고 있고 글로벌 완성차 업체가 전기차 출시 시기를 앞당기고 있는 것도 LG화학 입장에서는 호재다.
LG화학이 전기차 배터리 사업에 뛰어든 것은 2000년부터다. 2009년 시제품을 양산하고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수주에 나섰다. LG그룹의 배터리 사업 발판을 만든 주역은 구본무 회장이다. 1991년 당시 그룹 부회장이던 그가 출장길에 영국 원자력연구원에 들러 충전해서 반복 사용이 가능한 2차전지 샘플을 직접 가져와 관련 부서에 개발을 지시하면서 LG의 2차전지 사업이 시작됐다.
구본무 회장은 그간 미국 홀랜드, 충북 오창, 중국 난징 등 모든 전기차 배터리 생산기지 기공식과 준공식에 직접 참여하며 배터리 사업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왔다. 구본무 회장은 폴란드 공장 기공식에도 직접 참여해 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차세대 시장선도 사업으로 육성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현재 LG화학의 전기차 배터리 사업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 받고 있다. 지난해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네비건트 리서치가 8개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업체의 비전, 파트너, 생산전략, 기술, 마케팅, 판매망 등 12개 분야를 종합 평가한 결과 LG화학이 1위를 차지했다.
현재 LG화학의 전기차 배터리 사업은 회사 전체 매출의 4% 안팎에 불과하다. 스마트폰 배터리 등 소형 전지 사업이 이익을 내고 있는 것과 달리 전기차 배터리 사업은 아직 적자를 내고 있다. LG화학의 사업 포트폴리오 측면에서 보면 전기차 배터리 부문의 흑자 전환이 시급한 상황이다. LG화학의 주력 사업인 기초화학 사업은 확실한 ‘캐시 카우(현금 창출원)’이지만 매출이 정체돼 있다. LG생명과학을 흡수합병하기로 한 바이오 부문은 성장성은 높지만 중장기 투자가 필요해 당장 수익을 내기는 힘들다. 하지만 앞으로는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란 게 시장의 예측이다. 한승재 동부증권 연구원은 “LG화학의 전기차 배터리 사업이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진입했다”며 “2016년 전기차 배터리 매출이 1조2,000억 원을 넘어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LG화학은 현대·기아차를 비롯해 미국 GM과 포드, 독일 벤츠와 아우디, 중국 상하이자동차와 디이자동차 등 세계 28개 완성차 업체로부터 82건의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기존 수주 금액 가운데 지난해까지 매출에 반영된 부분은 2조 원 가량으로 아직 34조 원의 일감이 남아 있다. 34조 원의 수주 잔량 중 30조원은 2세대 전기차에 들어갈 물량이다. 2세대 전기차는 한 번 충전에 300km 이상을 주행할 수 있는 전기차로 올해 말부터 각국 자동차 업체들이 내놓을 전망이다. 그동안 수주한 프로젝트가 앞으로 매출에 본격 반영될 것이란 의미다. LG화학은 이런 추세에 맞춰 전기차 배터리 매출을 향후 5년간 10배 규모로 늘리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제시했다. 지난해 7,000억 원대에 그친 매출을 올해 1조2,000억 원, 2018년 3조7,000억 원, 2020년 7조 원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했다.
LG화학은 석유화학과 전자소재, 배터리 사업에 이어 바이오 사업까지 영역을 넓히게 됐다. 석유화학 부문에 쏠린 사업구조를 개선하는 실리는 물론, ‘고만고만한 회사들이 경쟁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온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을 한 단계 성장시킨다는 명분도 챙길 수 있었다. 글로벌 메이저 화학업체로 도약하려는 LG화학의 광폭 행보는 그래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하제헌 기자 azzuru@hmg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