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강도 7.9의 대지진으로 도쿄가 아수라장이 되자 일본 정부는 전국에 긴급 전문을 보냈다.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고 도쿄 시내에는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는 자가 있다. 조선인의 행동을 엄밀히 단속하라’는 내용이었다. 곧이어 일본인들의 대대적인 ‘조선인 사냥’이 이뤄졌다. 한 경찰서에 수용돼 있던 한국인 83명은 기병대 1개 중대가 휘두른 칼에 목숨을 잃었고 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38명도 어린아이 한 명을 빼곤 모두 살해당했다. 무릎 꿇고 살려달라는 애원도, 임신부의 부른 배도 소용없었다. ‘관동 대학살’로 명명된 이 비극으로 6,600여명의 한국인들이 참화를 당했다. 일본 정부의 조작과 이성이 마비된 대중심리가 결합한 참극이었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진실은 빛과 같이 눈을 어둡게 한다. 하지만 거짓은 아름다운 노을과 같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한다.” 갈망하는 것이 클수록 진실은 사실이 아닌 ‘원하는 것’이 된다. 이런 사례는 역사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국가권력이 대중의 국가안보에 대한 집단적 히스테리를 이용해 평범한 유대인 장교를 반역자 스파이로 몰고 간 ‘드레퓌스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진실은 거짓된 다수에 저항하는 소수의 힘겨운 저항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중세시대 유럽인들을 광분시켰던 ‘마녀사냥’ 역시 장기간에 걸친 전쟁과 페스트 같은 전염병으로 피폐해진 민심의 집단발작과 기독교적 질서를 유지하려던 지배층의 합작품에 불과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포스트 트루스(post-truth)’를 선정했다. ‘객관적인 사실보다 신념이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대중 여론을 형성하는 데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황 또는 조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미국인들이 막말과 인종주의, 여성 비하 등 온갖 추문에도 불구하고 ‘미국 우선’을 내세운 정치인을 새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나 영국인들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를 택하는 비합리적 결정을 한 것을 보면 잘못된 선정은 아닌 듯싶다. 시대는 바뀌었어도 ‘사실’ 대신 ‘원하는 것’만을 보려는 이에게 진실은 여전히 필요없는 존재인 모양이다. /송영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