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서경씨의 #그래도_연애] 소개팅은 노동이다, 그것도 중노동!



‘나는 누구고, 여기는 어딘가?’

한적한 토요일 강남역 1시.


주말을 맞아 데이트 나온 커플들 사이에 혼자 우두커니 한 시간째 서 있다. 배는 고픈데 소개팅남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강남역 11번 출구 앞, 계단을 올라오는 모든 남자들이 혹시 소개팅남인가? 저 사람인가보다!! 저 사람이네!!! 힐끗거렸지만 모두 무심히 내 곁을 지나친다.

조금만 늦겠다고 한 그의 카톡은 30분 전에 온 게 마지막이었다. 두 시간 동안 고데기로 머리 손질하고(고데기를 만져 본 게 몇 개월 만인지...) 나름 새로 산 화장품 개시하고, 옷장 깊숙한 곳에 고이 모셔둔 옷을 고르면서 두근거렸던 나 자신의 지난 3시간에 슬슬 짜증이 밀려온다.

“혹시 이서경씨 되세요?”

약속된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등장한 소개팅남, 미안한 기색도 없다. (이런 뻔뻔한 ㅠㅠ) 점심이 훨씬 지나버린 시간에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지 생각도 없다.

“입맛도 없는데 그냥 술이나 마실까요?” (허걱! 뭐야, 이 남자?)

소개팅남의 제안에 토요일 대낮부터 호프집을 갔다.(에라 모르겠다, 빈 속에 술이로구나) 서경씨는 술김에 속사포로 소개팅 매너에 대해 ‘일장 연설’을 풀어냈다.

“저기요, 조금 늦는다 하셔 놓고 한 시간이나 늦어도 되는 거에요? 소개팅 어떻게 할지 계획 같은 거는 없나요? 제 시간에 만나서 분위기 좋은 식당도 가고 차도 마시려고 했는데 이렇게 늦으시면 어떻게 하자는 건지... 나이도 젊은 사람이 그렇게 소개팅하면 여자들이 싫어해요!!!”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호프집 소개팅’을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주선자인 애자한테 연락이 왔다.

“서경아, SNS에 소개팅남이 글 올렸어. 지금 소개팅한 여자가 진상을 부렸다고 하는데, 네 얘기지? 너 어떻게 했길래 그런 소리까지 나와?”

(헐...)



#소개팅 횟수는 쌓여만 가고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만났던 8월의 그 남자는 식당이 덥다며 종업원을 불러 화를 냈다. 이어 음식 맛이 없다 등 이런 저런 트집을 잡으며 화를 냈다. 바로 앞에 앉아서 그런 진상을 보고 있자니 밥이 목구멍으로 들어가질 않았다.(이 남자, 혹시 사귀게 되면 나를 때리려나??)

관련기사



처음 만난 자리에서 루이*똥 지갑을 꺼내보이며 부를 과시한 남자도 있었다. (저, 그런 거 안 물어봤는데요...)

“강남에 내 이름으로 된 집이 세 채 있어요. 남중, 남고 나와서 주변에 여자도 많이 없었고 다른 데 돈 쓸 일도 없어요.” (그래서, 어쩌라고? 나한테 쓴다는 거야? 그럼 난 완전 환영~~)



자리에 앉은 지 10분도 안 돼 “저 서경 씨 맘에 들어요”를 외치고는 현재까지 연락 두절 상태다. (지금도 궁금하다! 너 그때 뭔 생각으로 그랬니?)

주선자에게는 “서경 씨 진짜 맘에 들어, 나 애프터 할 거야”라고 전해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던 기억도 있다.

30년 넘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처음 만나 한두 시간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모든 걸 알 수 없다. 그래서 소개팅에 나서면 더듬이의 날을 곧추 세우며 상대방의 말투, 행동, 옷차림 등 작은 거 하나라도 놓칠까 단서 찾기에 나선다. 혹시 나한테 관심이 있을까 하고... 단서를 찾고 해석하는 것도 힘든데, 각자가 생각하는 ‘정상의 범위’에 벗어나기까지 가면 피곤은 더 가중되기 마련이다.(가을 인사에서 부장이 보기 좋게 자기 동기한테 물 먹으면서 별 것도 아닌 일에 성질을 내서 그 남자 기분 맞추느라 컨디션이 엉망인데 말이다!!)



#소개팅도 노동이다

소개팅 횟수가 늘어갈수록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지쳐간다.

서른이 되기 전 주말마다 소개팅을 했다는 달걀한판녀는 “여자들은 소개팅 나가려면 머리 다듬고 화장하고 옷 고르는 데 몇 시간 걸리잖아. 그렇게 해서 나가면 또 판에 박힌 대화들을 이어가. 똑같은 얘기를 상대방만 다르게 하고 있는 게 계속되면 지쳐”라고 말했다. 달걀한판녀는 당분간 소개팅을 하지 않겠다고 ‘중대 선언(?)’을 했다.(과연 몇 달이나 갈까?)

소개팅에 나서는 남자도 육체적 정신적 피로도는 마찬가지다. 서경 씨의 지인, 철벽남은 주선자를 생각해 예의를 지키면서 소개팅 피로를 줄이기 위한 나름의 규칙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오면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맘에 들지 않으면 아이스커피를 마셔. 주선자한테 예의 없다는 소리 안 들어가게 어느 정도(?) 선을 지키면서 조금이라도 빨리 마시고 일어나고 싶어”

(내 맞은 편에 앉아 아이스커피 주문했던 소개팅남은 누구누구였더라?)

한번 소개팅하고 나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지치지만 그렇다고 소개팅을 포기할 수 없다. 소개팅 외에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없다. 한 달 반 뒤 서른이 되는 서경 씨 친구들은 하나같이 “사람을 만나는 게 마땅치 않아. 같은 회사에서 만나는 건 부담스럽고. 결국 소개팅 밖에 없어”라고 입을 모았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수북이 쌓여가는 외로운 가을 퇴근길에 서경씨는 옷깃을 여미며 중얼거린다. “하늘에서 남자친구가 똑 떨어졌음 정말 좋겠다~”

연애세포죽은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