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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작은형' 전석호 "나쁜 사람이라고 그냥 괴롭히는거 아니에요"

“안녕하세요 전석호입니다. 이거 쑥스럽네요 우하하하.”

‘미생’에서 화만 내던 하대리를 염두하고 진지하게 다가서려 했던 선입견이 우장창창 무너졌다. 연예인보다는 배우, 예능형 배우보다는 대학로 연극배우 같은 그의 ‘무장해제’에 오히려 함께 배석한 기자들이 긴장감을 내려놨다.


술한잔 앞에 두고 진지하다 웃고 다시 진지해지는 것 같은 그와의 대화는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서도 끝날 줄을 몰랐다. ‘자 이제 2차 가자’는 이야기까지 터져나왔다. 진지함과 유쾌함을 동시에 지닌, 그러나 얼굴은 긴장감을 자아내는 그와의 대화는 한마디로 즐거웠다.

전석호가 주연을 맡은 영화 ‘작은형’은 감옥에 다녀온 ‘동현’이 과거 사기쳤던 조폭에게 쫓기자 1억원이 든 통장을 가진 작은형에게 또다른 사기를 계획하며 벌어지는 동거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그는 철없는 사기꾼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익히며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거듭나는 주인공 동현 역을 맡았다.

사진: 파인스토리사진: 파인스토리


Q. 영화를 본 소감은.



감독님 말을 빌리자면 ‘마치 애를 낳아놓고 책임지지 않다가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느낌’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오랜만에 배우들과 감독님을 만나 기뻤어요. 영화 제작 전부터 워낙 친해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었고, 특히 개봉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많이 나네요.

배우로서 알려지는 것도 좋지만 알게 모르게 참여한 친구들이 많잖아요. 조감독, 카메라감독, 분장담당…. 그 친구들에게 개봉을 하냐 못하냐는 자기 경력에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거든요. 누군가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식이 생긴 거니까 기분이 정말 좋아요.

Q. 이전 작품들에 비해 주목하는 시선이 늘었다.



미디어에 노출된건 얼마 안되는데 운이 좋게도 많은 분들이 알아봐주시는 것 같아요. 공연을 할 때는 흔히 배우 수만큼 관객을 모시고 연기하는 순간이 많잖아요. 그럴 때 오기가 생기기도 하고. 그런데 그때마다 누구를 위해 공연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작품을 선택하는 것처럼 관객도 선택하는 거잖아요. 냉정하지만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죠. 잘 봐달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영화도 공연도 잘 만들어야 사람들이 찾는 거라고 생각해요.

Q. ‘미생’으로 주목받은 직후 독립영화를 찍었다.



‘물 들어올때 노저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 물이 인생에 한번 들어올까 하는 생각도 있고. 드라마를 하면서 부족함도 느꼈고, 아직 이르다는 생각도 했어요. ‘미생’을 마치고 공연도 하고 영화도 찍으면서 조금 더 생각하고 배울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소속사에서는 왜 숨냐고 했는데 그냥 공부하고 싶다고 했어요. ‘작은형’도 겉으로 보기에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저는 영화 ‘가족의 탄생’처럼 피한방울 섞이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는 이야기,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이야기라고 보지 않았어요. 육제척 시각에서 벗어나 나 역시 장애를 안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장애인도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며 살아가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죠.

사진: 파인스토리사진: 파인스토리


Q. 감독과 워낙 친하다보니 연기하는데 수월했을 법도 한데.



‘작은형’은 사람냄새 나는 작품이라는게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작품 선택과정에서 시나리오도 중요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이 사람냄새 나는 사람이냐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그런 사람이 정성을 다 해서 썼다면 잘 만들거고, 그런 사람들이 모일 거라고 몽상가처럼 생각하고는 해요. 촬영기간 두 달이 그랬던 것 같아요.

Q. 불편한 현실을 불편하게 만들어서 좋았다?



누군가를 위로할때 아무렇지도 않은척 힘을 줄 수도 있지만, 나도 슬프다고 이야기 해주는게 더 위로가 되잖아요. 내가 사는 세상이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다는 것. 제 연기가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당신만 힘든게 아니라 또다른 힘든세상도 있고, 거기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공감으로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작품 안에서 저는 불편한 사람들을 불편한 시각으로 바라봐요. 장애인이 나와 불편한게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제 시각이 불편한거죠. 그들에게 도움 받으면서도 그걸 몰라요. 가랑비에 옷 젖듯 계속 이런 작품생활을 한다면 사람들의 시각이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요. 그냥 연기하고 싶지 않다는게 그런 부분 때문이거든요.

Q. 억울하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주로 연기해왔다.



개봉 이야기를 듣고 감독님과 술한잔 하면서 ‘연기를 왜 하지’라고 생각해봤는데 억울한 사람들을 위하 하는 거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억울한 개인이 소리치면 잘 안들리거든, 그런데 배우가 작품에서 이야기하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잖아요. 그래서 억울하고, 사회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해요.

화면 앞에서 달콤한 이야기, 좋은 이야기는 잘 못해요. 심오하고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살면서 불편한 이야기를 툭툭 던지는, 그런 캐릭터가 좋아요. ‘미생’도 그랬고 ‘굿 와이프’도, 조그만 독립영화들도 그랬죠. 소속사는 이 시나리오는 어디서 받아오냐고 하는데 제 신념이 확고한걸 아니까….

영화 ‘작은형’ 스틸영화 ‘작은형’ 스틸


Q. 멜로, 감성극 등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건가.




아름다운 사랑을 해야 하는 판타지라도 그 안에 또다른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게 한다면 당연히 오케이죠.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순수함, 알콩달콩한 작품을 찾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결은 아닌 것 같아요. 뭔가 손가락이 한마디 없어지고, 손톱이 자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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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래서 못된 역할을 계속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쁜사람도 그냥 괴롭히는건 아니에요. 작품 내에서 표현될 수도 아닐수도 있지만 손바닥이 마주치려면 두 쪽이 있어야 하잖아요. 괴롭히는 것과 당하는 것은 일종의 역할놀이라고 생각해요. 반대편에 선 못된 사람을 통해 착한 사람이 부각되는 거죠. ‘작은형’에서도 저는 단순히 돈을 뜯어내려는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뜯어낸 돈을 또 뜯어내려는 누군가가 있죠. 사람 하나하나가 자기만의 스토리가 있는 거니까 모두가 잘 표현하면 핵심 메시지 전달이 깔끔해지게 돼요.

Q. 인상이 조금 세보여서 자주 그런 역할이 들어오는 건가.



맞아요. 한국사람 같기도 하고 혼혈 같기도 하대요. 저사람이 나쁜놈 같은데 눈은 쳐져있고, 화는 내는데 다 쏟아내지는 않는 것 같아 애매하거든요. 그게 제 본모습이에요. 그래서 ‘미생’에서 (강)소라에게도 그렇고, ‘굿 와이프’에서도 모두 쏟아내지 말고 조금이나마 감정을 남겨두자고 생각했었죠. 그냥 나쁜놈은 없으니까. 그런데 인상이 한몫하고, 목소리도 크고, 제스처도 크니까 감정이 크게 느껴지나봐요. 정작 친구들은 연기하는게 평소와 다르지 않다고 하거든요.

영화 ‘작은형’ 스틸영화 ‘작은형’ 스틸


Q. 그러게 ‘미생’에서 강소라가 정말 무서워하는 것 같더라.



엄청 힘들어했어요. 달가운 표현 하나 없었으니까요. 친구들은 ‘미생’을 보면서 ‘너 정도는 괜찮아. 우리 회사에는 이런 상사도 있어’ 하더니 나중에는 ‘그게 너였어’라고 하더군요. 다들 오차장 같은 상사를 원하지만 모든 상사가 하대리고 마부장이래요. 주변 상사와 똑같다고 하는게 그만큼 공감가기 때문이 아닐까요.

화면에 나오는 누구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순간 내 주변에 있는 사람처럼 느끼는 것처럼 저는 반대로 사람 구경하는걸 좋아해요. 연인들의 싸움, 장사하는 모습, 회사원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나라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죠. 결과적으로 연기는 내 안에서 시작하는 거지만 내가 바라보고 고민한 부분이 담겨있거든요. ‘작은형’의 캐릭터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어려웠던 순간들에서 가져온 거에요.

Q. 장애인 연기를 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그들에 흡수돼가는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첫만남’이었어요. 몇 년 만에 형을 만나 집에 들어가는데 장애인들이 하나 둘 나타나는 거에요. 연기를 하면서도 부끄러운게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극중 인물이 아니라 제 시각이기도 했었어요. 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지? 하며 황당하기도 했지만 무서웠고, 혼란스러웠죠. 그 이후부터 내 영역을 만들기 위해 상대를 해하기도, 윽박지르기도, 뒤로 숨기도 하는 모습들이 실제와 같이 나와요.

기왕이면 아닌척 하지 말고,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느끼자고 생각했어요. 화면을 보면 진심으로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거든요. 그게 영화를 보는 당신의 얼굴일 수도 있다는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봉사활동 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되게 부끄럽잖아요. 표정관리도 안되고 자괴감도 들고, 그 불편함을 서서히 풀어내고 이런 시각을 가진 나 스스로를 용서하는게 작품을 위한 첫 번째 단계였던 것 같아요.

Q. 극중 산소 앞에서 시각장애인이 바이올린을 켜고, 그 옆에서 다른 장애인 식구들이 춤추던 장면은 유독 강한 인상이 남는다.



대사가 거의 없지만 강력한 장면이고, 감독님도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잘못 찍으면 큰일난다는 생각도 들었죠. 영상에 색이 입혀지고 음악이 더해졌을 때 이 장면이 참 먹먹함을 주더라고요. 노래를 부를까 하는 생각도 했었고, 여러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배우들이 모두 자기 생각을 믿고 연기했어요.

독립영화라는 작은 제작여건 속에서 미장센 아닌 미장센을 그려냈다는 부분에서 심광진 감독이 대단한 성과를 낸거죠. 대본만 봤을 때는 사실 잘 못느꼈어요. 확실히 글이 화면으로 나오면서 살아났다는 느낌을 받은 신이죠. 개인적으로도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에요.

영화 ‘작은형’ 스틸영화 ‘작은형’ 스틸


Q. 조금 더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



매번 고민하는 지점이에요. 가진게 많으면 잃을까봐 두려워하게 될거라고 생각해요. 현재를 즐기는 성격이기도 하고. 작업할 때는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미친 듯이 쏟아내는 스타일이에요. 우스갯소리로 작업을 많이 안한다고 하는데, 불특정다수를 위해 공연하고 연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과감히 안하는게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서른셋 나이에 할 수 있는게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회사에 다니는 주변 친구들 보면 다들 대리 아니면 사원이잖아요. 그 친구들이 할 수 있는게 그리 많지 않아요. 그 부서 안에서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지만 막상 세금을 어떻게 내는지도 잘 몰라요. 저도 그렇고.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 하기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게 맞다고 생각해요.

Q. ‘미생’ 이후 사람들이 많이 알아볼텐데.



고창석 선배가 사람들과 사진을 정말 잘 찍어주세요. 모든 사진들의 표정이 똑같아요. 입을 벌리고 있거나 손을 흔들거나, 사실 못찍히는 거거든요. 이유를 물어보니 ‘아이고 힘들다’ 하시면서 ‘너 같으면 누가 지나갈 때 사진 찍어달라고 할 용기가 있냐. 내가 특별한 이유 없이 거절하는건 저사람의 용기를 말살시키는거야’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순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을 생각하는 면에서 참 많이 배웠어요.

저도 이전에는 술자리나 지나가다 사진 찍어달라면 웃어 넘겼어요. 하지만 그때 이후로는 ‘저사람이 찍고 싶다는데, 잘못 나오면 버리고 어느정도 봐줄 만하면 갖고 있겠지’ 하며 적극적으로 응해요. 얼마 전에 광화문에 나갔는데 사진 찍어달라는 분들이 많더군요. 시국이 시국인 만큼 웃으며 찍기도 뭐하고 어떻게 찍을까 물어봤더니 ‘어디 안올릴게요’ 하시더라고요. 그런걸 보면 마음놓고 돌아다니고 사람들과 어울려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변 환경이 걱정돼서 그렇지 제가 돌아다닌다고 해서 사람들이 막고 차가 멈출 정도는 아니잖아요. 제가 맡았던 역할이 좋았던거죠. 처음에는 긴가민가 하다가 막상 말걸기는 애매한 정도? 누군가가 지나가다 ‘혹시’ 라고 물으면 ‘아닌데요’ 하면 진짜 아니라고 믿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뭐가 아닌데? 싶죠.(웃음)

최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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