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종의 기원’ 출간 당시 조선은...



1859년 11월24일, 런던이 발칵 뒤집혔다. 진원지는 이날 출간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원래 제목은 길었다. ‘자연선택의 방법에 의한 종의 기원, 또는 생존 경쟁에 있어서 유리한 종족의 보존에 대하여’라는 긴 제목을 가진 초판 1,250부는 발매 당일 다 팔렸다. 다윈은 이 책에 젊음을 바쳤다. 만 22세에 영국해군 조사선 ‘비글호’에 승선한 이래 4년10개월의 항해를 포함해 28년간 끝없는 보완과정을 거쳐 지천명(知天命·50세)에 이르러서야 ‘종의 기원’(다윈은 1862년 나온 6판부터 제목을 ‘종의 기원’이라고 줄였다)을 내놓았다.

런던이 뒤집힌 것은 종교계의 반발 때문.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창조론의 입장에서 ‘진화론’은 과학의 이름을 빌린 이단이었을 뿐이다. 물론 다윈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종의 기원’이 나오기 이전에도 진화론자들이 없지는 않았다. 프랑스 파리 왕립식물원 책임자였던 뷔퐁(자연학자·박물학자로 파리왕립식물원 총책임자 역임)은 다윈보다 거의 1세기 앞서 종들이 진화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영국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도 먹이와 영역 싸움에서 강한 종이 승리, 번성한다고 봤다.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로 의사 겸 시인이었던 에라스무스 다윈은 뷔퐁의 견해를 이었다.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달하고 그렇지 않은 기관은 퇴화한다’는 ‘용불용설(用不用說)’을 주창한 프랑스의 라마르크는 다윈보다 50년 앞서 ‘동물 철학’에서 형질변경 이론을 주창했다. 영양이 높은 곳의 나뭇잎을 먹기 위해 목을 늘이다 보니 기린이라는 새로운 종으로 변했다는 게 그의 대표적인 주장. 생물의 종이 수 세대 동안 자연의 계단을 몸부림치며 오른다는 개념을 내세웠다. 다윈은 이들 외에도 인구론을 쓴 토마스 맬서스와 독일 지리학자 흄볼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적자 생존을 진화의 원동력으로 본 것이다.

다윈이 자신보다 앞섰던 수많은 학자들을 제치고 진화론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이유는 치밀한 논거를 제시했기 때문. 오랜 준비 과정 동안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을 제시하며 수많은 증거를 들었다. 다윈의 연구업적은 소통 노력에서 나왔다. 평생 1만 통 넘게 편지를 쓰며 학자들과 지면 토론을 거쳤다. ‘종의 기원’을 다윈 한 사람의 업적이 아니라 빅토리아 시대 집단지성의 발현이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윈의 창조론은 종의 기원 출간 7개월 뒤에 벌어진 ‘옥스퍼드 논쟁’을 타고 더더욱 유명세를 탔다. ‘진화론’이라는 토론 주제를 놓고 옥스퍼드교구 윌버포스 주교와 동물학자 토머스 헉슬리간의 토론은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윌버포스 주교가 ‘댁들의 조상 중에 원숭이가 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그 원숭이가 할아버지 쪽입니까, 할머니 쪽입니까?’라고 조롱하자 헉슬리가 바로 맞받아쳤다. ‘내 조상이 원숭이라는 사실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다만 주교님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과 혈연관계라는 점이 부끄럽습니다.’

토론장 곳곳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지고 창조론을 믿는 한 여성은 놀란 나머지 졸도했다고 전해진다. 치열한 논쟁이 오간 토론회가 끝난 뒤 양측은 서로 승리했다고 여겼지만 진화론은 헉슬리를 스타로 만들며 급속히 퍼졌다.(‘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헉슬리는 뛰어난 후손들을 남겼다. 유네스코 초대 사무국장을 지낸 생물학자 줄리언과 ‘멋진 신세계’의 저자인 올더스, 1963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생리학자 앤드루가 그의 직계 후손들이다.)

막상 ‘종의 기원’을 지은 찰스 다윈은 몸이 아파 불참한 옥스퍼드 논쟁은 ‘창조·진화 논쟁’의 서막이었다. 지리하게 이어지던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결은 1925년 미국 테네시주의 작은 도시 데이턴에서 열린 ‘원숭이 재판’으로 다시 크게 불붙었다. ‘공립학교에서는 인간을 원숭이의 후손이라고 가르칠 수 없다’는 버틀리법 통과(1925년 3월)에 저항해 대놓고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쳤던 고교교사 스콥스가 피고인. 전직 부통령을 포함해 미국의 초특급 변호사들이 대규모 변호인단을 꾸렸던 스콥스 원숭이 재판은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유럽에서도 취재 기자들이 몰려든 가운데 진행된 재판의 진행 과정은 신문 연재 소설보다 인기가 높았다.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왔는지, 뱀이 이브를 유혹하는 게 가능한지, 카인은 어떻게 아내를 얻었는지를 놓고 법정공방전을 펼쳤다. ‘고집과 무지가 교육을 무너뜨린다’는 피고 측 변호인단과 ‘성서는 단 한 글자도 틀림이 없다’던 검찰이 맞선 결과는 원고인 테네시주의 승리. 배심원단은 피고에게 최저형인 100달러 벌금형을 내렸다. 창조론자들은 판결에서는 이겼지만 재판 과정의 보도를 통해 비웃음을 샀다. 테네시주는 스콥스를 방면함으로써 논쟁의 파급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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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콥스 원숭이 재판 이후 대세가 진화론으로 기운 가운데에서도 양측은 논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창조론은 창조과학과 신(神)의 지적설계론으로 발전하고 진화론도 ‘진화론 자체의 일부 가설이 과학적이라기 보다 철학적’이라는 점을 인정하며 서로 발전하고 있다. 진화론은 대중에게도 영원한 지적 흥미 거리다. 지적설계론에 맞서 ‘눈 먼 시계공’ 이론을 내세운 리처드 도킨스 같은 진화론자는 세계적 스타로 인기를 누린다.

창조론과 진화론 중에 과연 어떤 게 맞을지는 단정할 수 없어도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진화론이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수한 종이 살아남는다는 진화의 논리는 인간 차별로도 이어졌다. 다윈의 영향으로 사회적 진화론을 발전시킨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를 거쳐 다윈의 고종사촌인 의사 겸 통계학자인 프랜시스 골턴은 우생학 연구의 터전을 닦았다. 사회적으로 강한 인종이 살아남는다는 우생학은 독일에서 사회인류학으로 발전하며 히틀러라는 희대의 변종도 낳았다.

수많은 러시아인과 유대인과 집시들을 집단 학살장으로 내몰았던 사회적 진화론의 망령은 아직도 죽지 않았다. 서유럽에서 심심치 않게 출몰하는 네오 나치즘은 우생학적 우월감이 기반이다.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될 도널드 트럼트 당선자에 대한 우려의 시각도 나치와 맥락을 같이 하는 극단적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혹독했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종의 기원’은 초판 뿐 아니라 6판까지 개정판이 속속 매진되며 1만6,000부가 팔렸다. 당시에는 초베스트셀러였다. 부자 집안에서 태어나 부자 아내(엠마 웨지우드, 다윈의 이종사촌으로 도자기 재벌 조사이어 웨지우드의 딸)을 얻어 돈 걱정이 없었던 그는 막대한 인세 수입까지 올렸다. 재테크의 귀재여서 철도 투자로 막대한 수입을 거뒀다고도 전해진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157년 전, 조선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페리 함대의 내항 이후 근대화를 향한 진통을 겪던 일본과 달리, 겉으로는 평온했으나 속으론 곪아갔다. 외척의 발흥과 세도정치에 국가 재정은 비고 백성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졌다. 법과 원칙이 사라진 채 대통령의 비선 실세가 판치고 대통령 자신이 온갖 범죄의 몸통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상황과 다른 게 무엇인지….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하던 시절, 영국에 정녕 부러운 게 있다. 다윈 자신은 물론 할아버지, 고종 사촌의 직업은 모두 의사였다.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들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 애썼다. 시대를 바꾼 대작 ‘종의 기원’도 다윈이 꽃 같은 20대 초반 58개월을 바다와 외딴 대륙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나오기 힘들었을 터. 우리 시대에 그런 에너지가 있는가. 기성세대의 일원으로 자괴감이 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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