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친박 핵심 중진들이 그동안 금기시해온 박근혜 대통령의 ‘명예퇴진’을 직접 건의하겠다고 나선 것은 야당 주도의 탄핵 추진이 임박한데다 여권 내 비박들도 동조하면서 더 이상 물리적으로 대통령의 퇴진을 막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날에는 전직 국회의장 등 원로들이 늦어도 내년 4월까지는 하야할 것을 제안했다.
대신 물러날 바에야 쫓기다시피 물러나는 모양새가 아니라 구체적인 퇴진 일정과 절차가 정해지면 명예롭게 퇴진 수순을 밟게 하겠다는 게 친박 핵심의 생각이다. 실제 친박 핵심인 서청원·정갑윤·최경환·유기준·윤상현 의원 등이 비공개 오찬 회동을 한 자리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이대로 간다면 국회에서 탄핵될 수밖에 없는데 박 대통령이 본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스스로 입장을 표명하는 게 맞다”는 의견이 쏟아진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될 가능성이 크고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까지 최장 6개월간 국정혼란이 이어지면 박 대통령이 ‘식물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친박들이 퇴진을 선택하게 만든 것으로 풀이된다. 친박들은 전날까지만 해도 탄핵에 반대하고 대통령 탈당이나 퇴진에 대해서도 반대해왔다.
친박 핵심들은 퇴진을 하더라도 야당이 주도하고 강제적인 수단인 탄핵보다는 ‘질서 있는 퇴진’이 적절하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야권이 주도하는 탄핵 절차에 제동을 걸되 대통령 임기가 단축되는 개헌을 통해 명예롭게 물러나게 하겠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이미 임기 내 개헌을 제안한 상황이고 개헌은 국가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도 있어 임기를 단축해 물러나더라도 탄핵 때보다는 잃는 게 덜하다는 계산도 깔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 친박계 의원은 “지금으로서는 하야 아니면 탄핵인데 탄핵으로 밀려나기보다는 스스로 물러나는 게 옳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하야는 헌법을 벗어나는 결정인 만큼 개헌을 고리로 헌법과 법률의 범위 내에서 물러나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다른 친박계 의원은 “대통령 퇴진을 위해 정치권에서 정치적 퇴진 일정을 마련해줘야 한다”며 “예를 들면 개헌을 통해 대통령 임기를 내년 3~4월로 단축해주면 자연스레 퇴진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야권은 이날 친박계의 ‘명예퇴진론’에 대해 “탄핵 전선을 교란하기 위한 방편”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미 탄핵 국면에 들어섰는데 막연하게 퇴진하라고 해서는 안 되고 즉각 하야하라고 해야 했다”면서 “박 대통령이 지금처럼 버티기로 일관한다면 헌법 절차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친박의 퇴진 건의는 사실상 정치권에 불고 있는 개헌 논의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여권에서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개헌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고 친박 핵심인 이정현 대표도 개헌에 찬성하고 있다. 정진석 원내대표 역시 개헌 찬성 입장이다. 야권에서는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와 김종인 의원,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 등이 대표적인 개헌파다. 이렇게 되면 양 정당의 극단세력을 배제하고 모이자는 ‘제3지대론’이 ‘분권형 개헌’을 고리로 폭발력을 얻을 것으로 전망된다. /김홍길·나윤석기자 wha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