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똑똑한_직장생활 가이드 ‘플랜 Z’] <3>젖은 낙엽처럼 끈질기게 버티자

2030 여성을 위한 최명화 대표의 직장생활 가이드

최명화 최명화&파트너스 대표최명화 최명화&파트너스 대표


대학 4학년 때 취업을 고민했다. 당시엔 인터넷도 없던 세상. 정보는 제한적이었고, 산업 발달도 특정 분야에 치우쳤던 때였다. 신문에 난 어느 대기업의 신입 사원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하기로 결심했다. 외국어에 자신도 있었고, 나름 명문대를 나왔으니 합격은 무난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부푼 꿈을 안고 여의도에 자리한 접수처에 원서를 제출하러 갔다. 커다란 로비 한 귀퉁이. 작은 책상과 커다란 현수막. ‘신입사원 원서 접수처’.

“원서 내러 왔습니다!” 발랄한 나의 인사말과는 대조적으로 왠지 황당해하는 듯한 그 오빠들의 눈초리(아마도 인사부 대리쯤이었던 듯 싶다). 뜬금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본인 원서 접수이신가요?” “네, 저랑 여기 제 친구, 이렇게 둘이요.” 나와 함께 온 나의 베프도 자랑스럽게 원서를 내밀었다. 당황해 하는 기색을 보이던 두 오빠들. 잠시 후 너무나 미안하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을 꺼낸다.

“남자만 뽑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며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말도 안 돼. 그런 말 없었잖아!” 주머니 속에 접어뒀던 신문 공고를 다시 펼쳐 보았다. 맨 아래 아주 작은 글씨로 쓰여 있던 한 줄. ‘군필자에 한함’. 여의도 광장에 불던 바람이 유달리 차갑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이런 시절이었다. 덕분(?)에 나의 커리어에는 최초, 최연소 등의 수식어가 심심치 않게 따라 다녔다. 최연소 여자 임원, 최초 여성 임원. 언뜻 화려해 보일 수 있지만, 보고 배우고 카피할 여자 리더들이 없었다는 점. 마음 터놓고 수다 떨며 사사로이 공유할 여자 동료들이 없었다는 것. 생각보다 긴 세월 동안 견뎌내기 만만치 않은 상황이 이어졌다. 막막했으며, 또한 거칠었다.

“기업, 특히 대기업에 여자 임원이 왜 이렇게 없을까요?” 그동안 이런 질문을 많이도 받았다. 유리 천장이나 남녀 차별 같은 부분에 대한 나의 열띤 성토를 기대하는 의도적 질문이 대다수였다. 사회적 환경이나 육아에 대한 여자들의 차별적 의무감이 여전히 팽배한 만큼 많은 경우 여자들의 사회 진출, 더 나아가 조직내 성장이 상대적으로 힘든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경기장에 남아 있어야 볼을 차 보든, 엘로우 카드를 받아 보든 할 텐데, 그 기회를 잡기도 전에 어찌어찌 경기장 밖으로 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출처=이미지투데이경기장에 남아 있어야 볼을 차 보든, 엘로우 카드를 받아 보든 할 텐데, 그 기회를 잡기도 전에 어찌어찌 경기장 밖으로 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출처=이미지투데이


최근 들어 정부나 기업 차원의 노력이 이뤄지고 있지만, 그 속도나 질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회적 변화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어쨌든 각자의 몫을 해 내야 하는 것이니까.

“부장까지 버티는 여성들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너무 적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너무 객관적이고 표면적이어서 달리 반박의 여지도 주지 않는다. 바보 같은 대답 같기도 하고, 보다 근본적이고 거창한 이유를 대지 못하는 멍청한 답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 대답을 좋아한다. “그렇다! 버텨내지 못해서다.”

경기장에 남아 있어야 볼을 차 보든, 엘로우 카드를 받아 보든 할 텐데, 그 기회를 잡기도 전에 어찌어찌 경기장 밖으로 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직장은 등락이 심한 곳이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원래 없는 곳, 내가 이해 받기를 포기하고 다녀야 하는 곳이 직장이다. 어찌 매일매일이 행복하고 보람되며 알차기만 할 것인가.

별것도 아닌 일에 사람 간의 부딪침을 겪어야 하고, 나보다 훨씬 일도 안 하고, 못 하는 동료의 승진을 목격해야 한다. 어려움은 남녀 차별적이지 않다.


남자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직장 생활이 더 수월해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이 겪는 어려움은 고유의 특질로 더 치열할 수 있다. 그런데 절대 다수의 남자들은 그 어려움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천둥 번개가 치든, 묵묵히 좌절하면서도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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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주 간단하고 멍청해 보이는 답을 해 본다.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으니까.’

가까운 여자 후배들이 성공하고 싶다고 비결을 알려 달라며 조를 때마다 사석에서 내가 해주는 얘기가 있다.

“남편을 유학 보내라! 공부를 시키던지, 아니면 엄청 무리해서 강남에 집을 사던지. 그만둘 수 없는 절대적 이유를 일단 만들고 배수진을 쳐 놓아! 그럼 의외로 많은 일들이 명확해지고 단순해져. 넌 무조건 일단 버텨내야 하거든.”

몇 년 전 가까운 후배 하나가 40세가 다 된 남편에게 다니던 대기업 그만두게 하고 한의대 입학 준비를 시켰다. 삼수 끝에 들어간 한의대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지금 병원 개업을 준비 중이다. 자신의 적성을 찾아 제2의 커리어를 멋지게 준비하고 있는 남편도 복이 많은 사람이지만, 이러한 환경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나의 후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입시생이 된 남편을 대신해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 했던 내 후배는 거칠고 막막한 대기업 생활을 무척이나 즐기고 충성스럽게 해 나가고 있다. 원래 똑똑하고 일도 잘하는 후배였지만, 무조건 해내야 한다는 환경적 제약은 그녀에서 더이상 물러날 수 없는 심리적 배수진이 됐으며, 직장내 크고 작은 어려움조차 즐겁게 받아 들일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래, 나는 젖은 낙엽이다. 나는 안 쓸린다. 아무리 빗자루로 쓸어내려고 애써도, 나는 절대로 안 쓸린다. /사진제공=최명화 대표그래, 나는 젖은 낙엽이다. 나는 안 쓸린다. 아무리 빗자루로 쓸어내려고 애써도, 나는 절대로 안 쓸린다. /사진제공=최명화 대표


때로는 젖은 낙엽의 근성으로 버텨내야 할 때가 있다.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일단 견뎌내야 할 때가 있다. 당장은 이해할 수 없더라도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오면서 오히려 잘 풀릴 수도 있다.

더 나쁜 일을 피하게 하는 복일 수도 있고, 원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의 흑역사로 길이길이 남아야 할 때가 오기도 한다. 어찌 하겠는가. 내가 확실히 인정하고, 완벽하게 이해해야만 당위성을 갖는 것이 직장은 아니다. 너무나 복잡하고 은유적일 수 있는 직장 생활에서는 종종 찾아오는 침체기를 굳건한 마음으로 견뎌내는 근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 내가 노력하고 깨어있는 한, 비교적 공정하게 일들이 펼쳐질 것이라고 말이다. 시간차가 있을 수 있고, 다가오는 모습은 내 기대와 다를 수 있지만, 긴 시간의 프레임에서 보면 비교적 정당하고 공정한 결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져라. 그렇기 때문에 당장의 눈앞의 어려움으로 경기장을 망가뜨리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저러한 부침으로 힘들어하는 후배들에게 알뜰살뜰 조언을 해주다가, 맨 마지막에 이 말을 덧붙이곤 한다.

“젖은 낙엽 사진 한 장 보내 줄 테니 컴퓨터 바탕 화면에 깔아 놔. 매일 아침 컴퓨터 로그인을 하면서 들여다 보라고! 그 낙엽들이 너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닝 커피 한잔으로 오늘 해야 할 골치 아픈 일들을 계획하기 전에 심호흡 한 번 하고 이 사진에서 용기를 얻기 바란다. ‘그래, 나는 젖은 낙엽이다. 나는 안 쓸린다. 아무리 빗자루로 쓸어내려고 애써도, 나는 절대로 안 쓸린다’라고 말이야”

/최명화 최명화&파트너스 대표 myoungwha.choi00@gmail.com

최명화 대표는?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의 마케팅 컨설턴트, LG전자 최연소 여성 상무, 두산그룹 브랜드 총괄 전무를 거쳐 현대자동차 최초의 여성 상무를 역임했다. 국내 대기업 최고 마케팅 책임자로 활약한 마케팅계의 파워 우먼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최명화&파트너스의 대표로 있으면서 국내외 기업 마케팅 컨설팅 및 여성 마케팅 임원 양성 교육 프로그램인 CMO(Chief Marketing Officer) 캠퍼스‘를 운영하고 있다. 오랜 직장 생활을 통해 직접 경험하고 터득한 ’조직에서 스마트하게 승리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현장 전략서 ’PLAN Z(21세기북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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