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첫 눈에 너가 나의 운명이라 생각했어!”
지금, 이 순간, 내가 현실에서 듣고 있는 게 맞나 싶었다.
로맨틱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이 얽히고 설켰던 오해를 풀고 끝내 사랑을 확인할 때 등장하는 그 대사다.
서경씨는 마치 자신이 여주인공이 된 듯한 황홀함을 맛보았다.
하지만 저런 말을 할 줄 아는 남자는 역시 ‘세 치 혀로’ 여자를 들었다 놨다 한다는 ‘만고불편의 진리’ 역시 깨닫게 됐다.
서경씨가 이 남자를 처음 알게 됐던 건 대학교 3학년 때인 22살.
다양한 학내외 활동을 하며 이런 저런 사람들을 사귀어가던 시절이다.
청년 정치에 관심을 둔 학생들이 모였던 그 단체는 현직 국회의원을 비롯해 다양한 사회 스피커들과 소통해볼 수 있는 꽤 괜찮은 공간이었다.
갓 들어가 아무것도 몰랐던 서경씨와 다르게 그는 단체가 처음 기틀을 잡기 시작할 때 원년 멤버로 참여해 운영을 도맡아왔던 수장이었다.
늘 바빴고, 뜨거운 에너지로 넘쳤으며, 그런 그의 모습을 마음 속으로 흠모하던 여성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서경씨는 그에게 호감이 있던 건 아니지만 “일을 정말 열심히 한다”며 감탄했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남자: 서경씨 안녕? 늘 밝은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아^^
서경씨: 아~ 안녕하세요. 항상 저희를 잘 이끌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남자: 아니야~ 다 좋은 추억, 경험 쌓으라고 활동하는 거지~ 함께 해 줘서 고마워! 근데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니?
사적으로 다가온 이 남자. 대체 뭐지?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활동하는 사람이기에 저런 말을 쉽게 꺼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리더십 강하고 주변에 따르는 사람도 많은 만큼 자신의 입으로 내뱉는 말에는 책임을 질 거라는 확신을 주는 존재였다.
더구나 세상의 변화를 위해, 나보다 약한 자를 위한 세상을 꿈꾸었던 만큼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닐까 라는 어림짐작도 해보았다.
마포 근처의 작은 카페에서 그와 만났다. 그와 단 둘이 만난 건 처음이었다.
청산유수처럼 말을 잘 하는 그는 나를 처음 만났던 느낌이 어땠는지부터 얘기하지 시작했다.
나조차 몰랐던 나의 매력을 한참 끌어내더니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차분하고도 매력적인 어조로 이어갔다.
사람이 이렇게 말을 잘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혼을 쏙 빼 놓았다.
그남자: 나는 이 순간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하고 기쁘다. 너가 바로 내 앞에 앉아 있다니 이건 기적이야.
서경씨: (뭐야.. 이 시츄에이션은... 무슨 고백을 이렇게 훅 들어와...) 아~ 네네...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남자: 솔직히 말하면 너를 처음 봤을 때 딱 내 여자라고 느꼈어.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고 생각해서 단체에서 어떤 여자하고도 선을 긋고 지냈는데 네 앞에만 서면 흔들리는 내 자신이 느껴지더라. 이런 말 하는 게 부끄럽지만 너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어.
그는 야망도 컸고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도 넘치는 그런 류의 사람이었다.
대학에서도 과학생회장부터 시작해서 단과대학생회장, 그리고 총학생회장까지 자리란 자리는 다 휩쓸 정도로 리더십이 뛰어났고, 그런 덕분인지 이름을 대면 알만한 사람들과 친분을 갖고 있었다.
전화번호에 저장된 사람들만 3,000명이 넘었고 SNS엔 그가 한 문장만 올려도 댓글이 수십개 달렸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을 챙기며 바쁘게 살았던 그에게 나라는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니! 가슴 떨린 고백과 함께 우리의 사적 관계가 됐다.
하지만!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허울좋은 말빨’의 서막일 뿐이었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됐다.
그남자: 서경아. 나에게 너같은 여자친구가 생겨서 정말 뿌듯하다. 사랑을 모두 얻은 것 같아.
서경씨: 에이~ 무슨! 부끄럽게 왜 그래~
그남자: 내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여자로 만들어줄게. 기대해~ 널 퍼스트레이디로 만들어 줄거야.
서경씨: 응???? (아.......꿈이 큰 건 좋지만, 정말 너무 크다.....)
나를 퍼스트레이디로 만들어 주겠다는 등 나중에 공개 콘서트에서 날 무대에 세워 이벤트를 해주겠다는 등 온갖 감언이설이 끊이지 않았다.
모든 말은 ‘미래형’이긴 했지만 어쨌든 현재로서는 순수해 보이는 모습이 좋았고, 듣기를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그남자: 서경아, 내가 너 때문에 요즘 정말 행복하다. 그런데 이번 주엔 내내 저녁 선약이 있어. 저번에 봤던 애 알지? 걔가 새로 시작하는 일이 있는데 내가 꼭 필요하다고 하네? 월요일은 그거고~ 화요일은~ 수요일은~~!! 아 바쁘다 바빠!!! 이렇게 나를 찾는 사람이 많으니 너를 따로 만날 시간이 안 나네. 너만 데리고 어디 외딴섬으로 도망하고 싶을 정도야.(물론 이 대목은 그의 뻔한 거짓말인 줄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그는 모두가 찾는 그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에)
그의 일정은 정.말. 너.무.나. 빼곡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숨 돌릴 틈이 없었다.
나도 약속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일주일 내내 약속을 잡진 않을뿐더러 적어도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만나는 게 정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했다.
내가 불만이라고 얘기하면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그남자: 아!! 나도 정말 약속이 많아서 힘들다ㅠ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맡았잖아. 책임자가 난데 무책임하게 있을 순 없어. 다들 나만 바라보고 있는 거 너도 알지?
우린 싸우는 빈도가 늘어갔고, 싸우는 이유는 나의 ‘불만’ 때문이었다.
마지못해 데이트를 해도 그의 선약에 동행하는 수준이었다. 그의 옆에서, 그를 화려하게 만들어주는 소품처럼 그렇게 옆에서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람들 앞에서는 좋은 남자친구의 모습을 넘치게 보였고, 내가 ‘운명의 상대’라는 말도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사람들과 떨어져 우리만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면서 카톡을 주고 받거나 뉴스 검색을 하는 등 자신의 관심사에만 충실했다. 철저하게!!!
서경씨: 오빠. 늘 사람들에게 “내 사람은 내가 챙긴다”, “올바른 세상은 개인이 구한다”고 말하고 다니지 않아? 그런데 지금 오빠의 행동은 어때? 가장 가까운 나조차도 챙기지 못하면서 무슨 조직을 구하고 나라를 구해?
그남자: 지금 내가 노력하고 있는 거 안 보여? 너가 사회 생활을 안해 봐서 그래. 아직 어리잖아.
그는 내가 어리고, 사회 생활을 안 했기 때문에 모른다는 이유를 들이대며 상황을 강제 종료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주변에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처럼 바쁜 남자는 없었다.
세상 오만가지 온갖 일들은 혼자 다 끌어모으고 사는 것 같았다.
시작은 자기가 해 놓고 언제부터인가 내가 끌려가는 듯한 상황은 한동안 계속됐다.
나는 그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람보다 일이 중심인 워커홀릭이기도 했다.
내가 징징대고 철없는 여자인 걸까 수없이 생각해봤지만, 그건 결코 아니란 결론이 나왔다.
사랑은 일방향이 아닌 쌍뱡향의 커뮤니케이션이 기본이 아닌가!
워커홀릭? 좋다.
자기 일 사랑하고, 잘하고 싶어 열성을 보이는 순수한 태도.
하지만 그렇게 일만 하고 살 거면 일만 하고 살지 왜 이성은 찾는 걸까?
여자친구라는 달달한 존재도 있었으면 좋겠고, 자신의 일도 포기할 수 없어서?
일에는 시기가 있는데 그때 다 해놓지 않으면 미래가 두려워서?
나의 상식으로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여자조차 지키지 못하는 그가 과연 지금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봤던 수많은 변절자들처럼 그 역시 변할 거다.
내가 헤어지자고 먼저 말을 꺼냈다. 안 된다며 울고 불고 매달리지는 않아도, 적어도 충격이라도 받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역시 그는 나의 예상을 깨고 깔끔하게 이별을 받아 들였다.
우린 일을 하다가 만난 동료처럼 가볍게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가끔 그가 이루고 있는 성과들을 단체에서 같이 활동했던 이들에게 건네 듣는다.
서경씨는 생각했다. “헤어지길 정말 잘했어!”
그리고 오늘 저녁 만나기로 한 현재의 남자친구가 얼마나 다정하고 고마운 사람인지 새삼 깨닫는다.
남자는 여자에게 말이 아닌 마음으로 믿음을 줄 때 진정 멋있어 보인다는 걸 그는 과연 이제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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