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속으로 멍드는 나라…건륭제의 말년






18세기 후반, 세계 최강국은 어느 나라일까. 장담하기 어렵다. 식민지 개척과 산업혁명을 진행한 유럽 국가들이 성장하고 있었으나 중국도 강성하던 시기였으니까. 중국의 콧대는 높디 높았다. 1793년 통상을 요구하며 열하(熱河)까지 찾아온 영국 사절단에게 중국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은 넓은 땅에서 나오는 물산이 풍부해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다. 교역이 왜 필요한가. 멀리서 찾아온 그대의 충성심을 알았으니 선물을 받고 돌아가라. 앞으로는 일부러 사신을 먼 길로 보낼 필요가 없다.’

정말 그랬을까. 맞다. 청나라의 전성기였다. 인구나 영토, 경제력에서 중국은 역사상 최고의 번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잇따라 등장한 영민한 군주(강희제·옹정제·건륭제)들의 치세(治世) 아래 청나라는 태평성대를 누렸다. 유럽의 강국 러시아가 불평등조약이라고 느꼈던 국경조약인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은 것도 이 시절이다. 무력으로 한족(漢族)을 지배한 만주족은 중국에게 일찍이 누리지 못했던 번영과 국토 확장이라는 선물을 안긴 것이다.


영국 왕 조지 3세가 보낸 사절(사절단장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을 물리쳤던 청나라 천자는 건륭제(乾隆帝:1711~1799). 중국의 한족 출신 장군들은 물론 유생들까지 충성을 다한 군주였다. 영국 사절단에 대한 자만이 무리가 아닐 정도로 건륭제는 커다란 치적을 쌓았다.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태상황제 포함 63년) 동안 10여 차례 대외 원정으로 강역을 넓혔다. 문화와 예술을 장려해 고증학도 꽃피웠다. 경제도 키웠다. 건륭제의 말대로 교역은 불가능했다. 영국의 비교 우위가 없었기 때문. 천하의 영국도 팔아먹을 상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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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이렇다 할 항변도 못하고 물러난 후 불과 50년이 지나지 않아 처지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청은 영국과 굴욕적인 ‘난징조약’을 맺었다. 막강하던 청이 어쩌다 그런 지경을 맞았을까. 부패 탓이다. 화려한 외양과 달리 병든 내부가 밝혀진 것은 건륭제 사망(1799년 2월7일) 직후.

건륭제의 사돈이자 병권과 재정권을 쥐고 있던 화신의 부패에 청 조정은 경악했다. 20년간 국가 세수와 맞먹을 만큼 부정축재를 한 화신은 역사상 최악의 탐관오리로 기록되고 있다. 부패와 자만 끝에 싹튼 사회 혼란을 제국주의는 놓치지 않았다. 값 비싼 도자기며 차 수입에 은(銀)이 끝없이 유출되는 상황에서도 청나라 시장에서 통할 만한 상품을 찾을 수 없었던 영국은 밀수와 마약을 택했다. 문제는 영국이 공공연히 아편을 팔아도 청나라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 쇠락한 청은 아편과 선교사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 1912년 멸망에 이르렀다.

건륭제의 자만과 청나라의 부패는 남의 얘기일까. 부정축재로 구속됐던 전직 대통령과 정치인, 비선 실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을 받고 있는 현직 대통령이 부끄러움도 잊었는지 당당하기만 하다. 중국을 들어먹고 결국은 외세에 찢기게 만든 말년의 건륭제와 간신 화신의 망령이 21세기 한국 땅에서 득시글거린다. 시대가 젊은 시절의 건륭제 같은 지도자를 원한다지만 어쩌면 그마저 허상인지도 모른다. 중국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팠으니까. 영국 경제학자 앵거스 매디슨(1926~2010)에 따르면 당시 최고 부자나라는 네덜란드다. 1인당 국민소득이 2,609달러(1999년 가치 기준)로 2위인 영국의 2,097 달러보다 훨씬 높았다. 청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조선과 비슷한 600 달러였다. 개개인 삶의 질과 풍요가 결국은 국가의 성장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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