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경찰이 김정남 독살에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신경용 독가스인 ‘VX’가 사용됐다고 공식 발표한 가운데 김정남 암살을 둘러싼 북한의 억지주장에 불편함을 드러내 온 말레이시아가 급기야 단교 가능성을 직접 언급했다.
말레이시아 일간 뉴스트레이츠타임스는 아맛 자힛 하미디 말레이시아 부총리가 24일 “말레이시아는 범죄가 숨어 있는 곳이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재검토하겠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현지 언론이 익명의 관료를 인용해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 추방과 평양의 말레이시아 대사관 폐쇄 가능성을 보도한 적은 있었지만 정부의 최고위 공직자가 외교관계 단절을 직접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맛 부총리는 “말레이시아는 김정남 피살사건 수사에 있어 전문성을 보였지만 북한의 주장은 이에 걸맞지 않았다”며 외교관계 재검토가 ‘말레이시아 수사 결과를 믿을 수 없다’며 배후설을 비판해온 북한의 행태 때문임을 드러냈다.
이날 앞서 현지 경찰은 김정남 독살에 신경용 독가스인 ‘VX’가 사용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보건부 화학국이 김정남의 시신에서 검출한 시료를 분석한 결과 VX로 불리는 신경작용제 ‘N-2-디이소프로필아미노에틸 메틸포스포노티오에이트’가 검출됐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VX는 현재까지 알려진 독가스 가운데 가장 유독한 신경작용제로 수분 안에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 호흡기, 직접 섭취, 눈, 피부 등을 통해 인체에 흡수되며 사린가스 100배 이상의 독성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할릿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은 성명을 통해 “VX는 국제협약인 화학무기협약(CWC)에 따라 화학무기로 분류된 물질”이라고 밝혔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역시 VX를 화학전에서만 사용되는 가장 강력한 신경제로 분류하고 있다. 다만 할릿 청장은 VX가 북한과 관계된 것이냐는 질문에는 “거기까지는 나가지 않겠다”며 답변을 피했다. 그는 또 전날 누르 라싯 이브라힘 경찰청 부청장이 1~2일 안에 김정남의 가족이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말레이시아에 입국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한 데 대해 “사실이 아니다”라며 “유가족이 온다는 말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유가족이 직접 와서 신원을 확인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덧붙였다.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은 또 김정남 암살에 연루된 30대 현지 남성을 체포하고 북한 국적 용의자인 리정철(46)과의 연계 가능성을 조사하고 있다고 현지 일간 더스타가 전했다. 경찰은 이 남성이 머문 콘도에서 다양한 화학물질과 다수의 장갑·신발 등을 압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 남성이 김정남 암살에 어떻게 관여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쿠알라룸푸르 현지에서는 말레이시아 당국이 김정남이 묵었던 숙박지와 식사를 했던 식당 등 여러 루트로 유전자 정보를 확보해 지난 13일 사망자의 신원을 김정남으로 특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일본 아사히신문은 이번 사건을 독물을 이용한 암살공작을 담당하는 북한 정찰총국 19과에서 주도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지휘급 인사로는 1997년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씨를 살해한 최순호 과장이 거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