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이달 말 최소 1조원 이상의 펀드를 포함한 시장 친화적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내놓을 계획이지만 구조조정 기업의 채권을 쥔 은행들의 불만이 속출하고 있다. 정부는 채권은행이 구조조정 기업의 채권 가격을 지나치게 높게 불러 사모펀드(PEF)들에 매각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제3의 기관이 공정가격을 제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은행들은 획일적으로 구조조정 기업 채권 가격을 후려치는 것은 시장 친화가 아닌 구조조정을 내세운 ‘은행 팔 비틀기’라고 비판하고 있다.
8일 금융당국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이달 말 1조원 이상의 구조조정 펀드를 포함한 시장 친화적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발표할 계획이다. 성장사다리펀드 등 정책성 자금을 모아 모(母)펀드를 만들고 이 펀드가 다시 자(子)펀드에 유한책임사원(LP)으로 투자하면 자펀드가 여러 개별 기업을 인수하는 모자펀드 형식이다. 시중 PEF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PEF를 위탁 운용하는 무한책임사원(GP)인 PE 하우스의 성과보수를 일반 펀드보다 최대 2배까지 높게 책정했다. 특히 정부는 은행이 부실기업 채권을 시장 가격보다 높게 유지한다고 보고 이를 낮추기 위해 제3의 기관이 공정가격을 평가하도록 했다. 지금은 은행과 PEF가 각각 회계법인을 선정해 채권 가격을 정하며 은행과 PEF의 가격 차이가 지나치게 크게 형성돼 매각 작업이 순조롭지 않다. 정부 관계자는 “은행이 헐값 매각 논란을 피하기 위해 채권 가격을 높게 유지한 채 팔지 않는 경향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이 가진 기업의 채권 가격이 떨어지면 은행의 충당금 부담이 커져 당기순이익에 타격을 주는 것도 높은 채권 가격을 유지하는 이유다. 은행 출신의 IB 업계 관계자는 “은행은 일을 안 한다고 징계하지는 않지만 일을 벌렸다가 손실이 나면 불이익을 주는 업무 시스템이 고착돼 있다”면서 “시장 친화적 구조조정은 은행보다 자본시장에 더 적합하다”고 지적했다.
IB 업계에서는 정부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PE 입장에서는 매수 기업의 가격이 내려가며 투자 부담이 줄어든다. 그러나 은행은 울상이다. 시장 친화적 구조조정이라면서 계약의 첫 번째 요소인 ‘가격’에 정부의 입김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기업금융 관계자는 “그동안 구조조정 기업의 매각이 더딘 이유는 PEF가 제대로 된 자금 확보 방안이 없었던 탓”이라며 “구조조정 기업의 매각가는 계약 당사자가 협상한 끝에 나오는 것이지 계약에 참여하지 않는 제3자가 설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가격을 낮춰 무더기로 기업을 시장에 내놓는다고 매각이 될지도 미지수다. 한 PEF 관계자는 “최근 수익을 많이 낸 PEF를 보면 1년 이상 기업과 업종을 연구하고 경영전략까지도 고민한 후 매수를 한다”며 “가격이 싸다고 펀드의 목적과 맞지 않는 기업을 인수했다가 수익을 내지 못해 제대로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는 폐해가 발생할 수 있다”며 “자칫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아닌 부실채권(NPL) 거래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누가 구조조정 기업 채권의 공정가격을 결정할 것인지도 관건이다. 정부는 금융감독원의 회계감리부서, 회계법인, 산업연구원 등 산업전문가 등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금감원이 나선다면 ‘관치’ 논란에 빠질 수 있고 산업연구원 등은 재무 분석의 한계가 있다. 결국 경영 컨설팅과 회계감사, IB 업무를 두루 하는 회계법인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특히 ‘빅4’로 불리는 대형 회계법인은 기존에 은행이나 PEF와의 계약에서 나오는 수수료가 크고 앞으로 고객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은행의 불만을 사는 공정 가격 제시에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