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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왕위 주장자들’ 다툼은 왜 반복 되는가…권력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

“드디어 내가 노르웨이의 왕이다”(호콘 왕) VS “노르웨이를 지배하는 건 여전히 나다”(스쿨레 백작)

13세기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당시 노르웨이 정세에만 주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재 가장 큰 화두인 조기 대선 정국을 떠오르게 한다. 호콘 왕과 스쿨레 백작의 대사에서 노르웨이를 지우고 대한민국이라 써 넣어도 어색하지 않다. 바로 ‘왕위 주장자들’ 이야기다.


작품이 표면적으로 다루는 내용은 왕위 다툼이다. 스스로를 평범한 시민이라 여기는 관객들에게 주인공의 고뇌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면적으로 파고들면,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인간이 겪는 좌절과 성취의 이야기가 된다.

서울시극단이 창단 20주년 기념작으로 연극 ‘왕위 주장자들’ 국내 초연을 선보였다. ‘왕위 주장자들’은 노르웨이 유명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1863년에 쓴 작품이다. 13세기 노르웨이 왕가와 귀족, 교회의 권력 다툼을 다뤘다. 시대극이지만, 현대극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인간 본연의 감정과 고뇌를 치밀하게 풀어냈다.

/사진=세종문화회관/사진=세종문화회관


‘왕위 주장자들’은 권력을 향한 인간들의 치열한 갈등을 엿볼 수 있는 연극이다. 호콘 왕의 어머니 잉가부인은 불에 달군 쇠를 만지는 불의 시련을 받는다. 이를 통해 호콘은 자신이 선택받은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왕좌의 가장 가까이에서 섭정을 하고 권력을 누려온 스쿨레 백작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왕은 호콘이지만, 옥쇄는 스쿨레 백작이 가지고 있다.

이들을 오가며 권력의 분열을 꾀하는 사람이 바로 니콜라스 주교다. 그는 누구도 노르웨이의 절대 권력을 갖길 원하지 않는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망가뜨리겠어’의 전형이다. 확신으로 똘똘 뭉친 호콘 왕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스쿨레 백작, 주교는 이 틈을 노린다. 스쿨레 백작에게 호콘 왕이 사실은 적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불어 넣는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존경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다는 열망을 넘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욕구다. 이런 욕구를 타고난 인간에게 권력이라는 열매는 무척이나 탐스럽다. 권좌에 앉는 것은, 그 자체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라 여겨진다.

/사진=세종문화회관/사진=세종문화회관



따라서 관객들은 연극을 보는 동안 주인공을 통해 자신을 비춰보게 된다. 여기서 ‘왕위 주장자들’의 진가가 드러난다. 무엇인가(연극에서는 ‘왕좌’로 대변된다)를 열망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타인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 자신에 대한 의심 혹은 확신,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분란이 일어나길 바라는 추악함까지 마주한다. 외면하고 싶은 부정적 내면일지라도 ‘왕위 주장자들’은 한 겹의 포장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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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은 단순하지만 명쾌하다. 김광보 연출은 공간을 가득 채우지 않는 ‘빈 무대’ 연출가로 유명하다. 이번에도 천장에 달린 거대한 나무뿌리 외에는 별다른 무대 장치를 찾아보기 힘들다. 나무뿌리는 왕관, 혹은 그 왕관이 상징하는 권력의 근원을 암시한다. 주인공들은 그 아래에서 웃고 울고 화내며 자신을 내보인다.

번역을 맡은 김미혜 교수는 입센이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해 확신을 갖고 소명의식과 신념에 따라 자신의 일에 매진하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결론”이라고 전했다. 김광보 연출은 김미혜 번역의 해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성공을 이룬, 즉 이긴 자가 가진 희망이 진정한 희망인지 의심하기를 바랐다.

/사진=세종문화회관/사진=세종문화회관


인물의 내면 심리가 두드러지는 만큼, 배우들의 연기력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단연 눈에 띄는 이는 스쿨레 백작을 맡은 유성주다. 그는 확신과 의심으로 점철된 복잡한 내면심리로 인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인물을 표현했다. 독백도 가장 많은데, 그 어렵고도 긴 대사를 2시간 내내 쉬지 않고 소화해낸다. 표정은 또 어떤가. 권력을 맛보았을 때의 희열부터, 상대에 대한 열등감으로 빚어진 절망까지 소름끼치게 그려낸다.

호콘 역의 김주헌은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김광보 연출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에 대한 신념으로 똘똘 뭉친 호콘에 비열함을 한 스푼 넣어 연기했다. 관객으로 하여금, 절대 권력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도록 한 것이다.

다른 인물과 비교해 유독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도 아닌데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낸 배우가 있다. 니콜라스 주교를 표현한 유연수다. 전혀 유쾌하지 않은 캐릭터가 가장 많은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 웃음이 마냥 개운치는 않다. 주교다운 인자한 표정을 지으면서 뒤에서는 스쿨레 백작을 조종하려 하는, 주인공 중 가장 타락한 악마성을 가졌기에 그렇다.

물론 연극을 따라가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 고전극이기에 대사가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 장면도 있다. 또한 주인공의 감정선을 완벽하게 따라가기 벅찰 수도 있다.

그러나 내 능력에 대한 확신과 의심,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타인에 대한 질투와 좌절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음직한 감정이다. ‘왕위 주장자들’은 인간 내면을 탐구함으로써, 왜 권력 다툼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지 날카로운 성찰을 하게 한다. 혼란한 시국에 더욱 의미 깊은 연극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왕위 주장자들’은 서울시극단 창단 20주년 및 세종 M씨어터 재개관 10주년 기념작이다. 오는 4월 2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한다.

/서경스타 양지연기자 sestar@sedaily.com

양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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