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가까이 청소년과 장애우, 인권 개선을 위한 작품을 집필하고 실제로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 윤학렬이 다시 한번 문제작을 들고 나왔다.
20일 개막한 영화 ‘지렁이’는 장애우의 아픔과 청소년 왕따 자살 문제를 다룬다. 청소년 성범죄의 피해를 입은 딸 ‘자야’(오예설)를 둘러싼 진실을 밝히고자 울부짖는 장애우 ‘원술’(김정균)의 이야기가 주요 줄기로 펼쳐진다. 이 모든 현실을 하나 하나 기록한 딸, 가해자와 피해자 그 누구의 편도 들 수 없었던 친구, 뒤늦게 진실을 알아차린 아비의 마지막 외침을 통해 우리 사회를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다.
윤 감독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학원 폭력으로 인해 자살하는 청소년들의 부모님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더더욱 문제의 심각성을 체감하며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의 홍보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거기서 사람이 상처에 물리게 되면 얼마나 나약해지는지를 봤어요. 사실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에 다 담지 못했어요. 현실은 더하거든요. 청소년들이 친구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기가 이미 늦은 경우가 많았어요. 이 아이들이 부모님에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생명을 내려놓을 때 뒤늦게야 부모들이 알게 되는 거죠.”
뒤늦게 알게 된 딸 아이의 고통 앞에서 부모는 어떤 마음을 갖게 될까? 무심했던 자신에 대한 자책,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길을 잃을 지도 모른다. 이에 감독은 아이들의 도움 요청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챙길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자야는 같은 반 친구들의 지능적인 괴롭힘을 참고 또 참는다. 자야 아버지의 이름을 또래 친구 이름을 부르듯 부르며 모멸감을 주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자존감 하나로 버티려고 하지만 이들은 결코 가만두지 않는다. 결국 자야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그게 바로 ‘이사 가는 게 어떠냐’는 장면이다.
“저는 그 장면을 자야의 라스트 콜링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자야의 감춰진 마음이 담겨 있는거죠. 이 딸이 사랑하는 아버지 얼굴을 닦아주면서 잠시 속마음을 표현하는데 아버지는 장사도 잘 되고 나쁘지 않으니까 여기에 계속 있고 싶어해요. 그렇게 ‘아빠가 좋으면 나도 좋아’ 라고 말을 해요. 그 말이 가슴이 아프죠. 원술도 딸 아이의 일기장을 보면서 그 순간들이 떠올랐겠죠.
“학교 폭력의 피해 부모들과 이야기 해보면, 그 때 그 아이가 날 도와달라고 했던거다. 그런데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말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아이가 ‘학교 가기 싫다’고 말했는데, 왜 무조건 학교는 가야만 한다고 했을까? 빠지고 싶다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는 건데...뒤늦게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요”
‘지렁이’란 영화의 제목은 성경에 나온 ‘지렁이 같은 야곱’에서 영감을 받았다. 감독은 단순히 피해자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닌 가해자와 피해자의 중간에 있는 방관자, 곧 우리 모두를 뜻한다고 했다.
“자야의 친구인 민경의 시선이 바로 방관자적인 태도로 볼 수 있어요. 우리 모두가 불이익을 당하면 용기를 내보려고 하는데 그 도전이 쉽지 않아요. 그래서 바로 앞에 경찰차가 지나가는데 민경이가 그냥 지나가요. 신고함으로써 행여나 자신이 피해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방관자로 살아가게 하는 거죠.”
“이런 문제 앞에서 대다수의 대중은 방관해요. 대중은 힘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결집되기 전까지는 힘이 없을지 몰라도 결집되면 힘이 커져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대다수의 대중들이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로 영화 제목을 ‘지렁이’라고 지었어요”
윤 감독은 대단한 제도 개선이나 방침을 도입하기 보다는, “친구가 친구를 괴롭히는 것은 잘못됐다고 외치는 대중이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핀란드에선 대통령이 나서서 하는 사회운동인 ‘멈춰라’ 운동이 있다고 한다. 친구가 친구를 괴롭히는 일이 발생했을 때 ‘멈춰!’라고 외치는 운동이다.
“게임처럼 만든 운동인데, 효과가 상당하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다수의 대중이 목소리를 냈을 때, 가해자는 ‘멈칫’하고 자신의 행동이 잘못 됐다는 걸 알게 되는거죠.”
윤 감독은 학교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어른들의 마중물”이 필요하도 했다.
“매번 우리 청소년들이 문제라고 하는데, 그것보다 어른들이 먼저 달라져야 해요. 청년들에게 진심을 이야기하면, 감동을 해요. 그런 마음의 결집력이 다른 문제를 이겨낼 수 있어요. 진심을 느낀 아이들은 ‘아 우리를 위하는구나’란 마음을 느끼게 되고 결국 환경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어요. 이 기사로 불이 붙기를 바랍니다. ”
윤학렬 감독은 희곡 ‘유원지에서 생긴 일’로 199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후, ‘오박사네 사람들’ ‘LA 아리랑’ 등 ‘1세대 시트콤’ 작업에 참여해왔다. 이후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며 그의 첫 작품인 장나라 주연의 ‘오!해피데이!’로 성공적인 영화계 신고식을 치렀으며, 지난해에는 그의 세 번째 영화인 철가방 우수氏‘철가방우수씨’로 나눔의 메시지를 전했다.
또한 디자이너 이상봉, 미스코리아 이성혜, 국민 록 가수 김경호, 개그맨 오지헌, 가수 소이의 학교폭력 피해 사례를 바탕으로 한 심리 치유 서적인 ‘학교폭력 NO 이젠, 아프다고 말해요’를 출간했다.
“난 세상을 밝게 만들고 싶은 보통사람”이라고 전한 윤 감독은 “나이를 먹을수록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고 말했다.
“한동안 시트콤 작가로 활동하면서 재미있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다 생각이 바뀌어요. 젊었을 땐 산 정상에 올라가기에 바빴어요. 이젠 멈출 수 있는 여유를 알게 됐다고 할까요. 꽃이 피었네, 열매를 맺었네 등 그렇게 둘러보게 돼요. 글 쓰는 사람으로서 사회적 책임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거죠. 과연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이요.”
윤 감독의 지론은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이다. 사실 그도 2013년 영화 ‘철가방 우수씨’를 만들기 전까진 미담 이야기에 의구심이 먼저 생기는 평범한 대중이었다고 한다. 중국집에서 배달하는 분이 72만원의 월급으로 5명의 아이들을 7년 동안 기부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뉴스를 듣고 맨 처음에 든 생각은 호기심과 의구심이었다고 한다.
“뉴스를 보고 정말 7년간 도운 일이 맞을까? 란 의심이 먼저 들었어요. 못된 마음이죠. 그런데 진짜로 그렇게 해오신 분이었어요. 거기서 오는 감동은 컸어요.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고 해야 하나. 어른들이 이야기했던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게 정말 맞는 말이었어요.”
아비의 마음으로 늘 이웃에 관심을 갖는 윤학렬 감독은 서울예대에서 ‘광장’ 최인훈 작가, ‘산불’ 차범석 작가, ‘수사반장’의 윤대성 작가의 가르침을 받았다. “절 조금이라도 좋게 봐주신다면 다 그분들 영향입니다. ‘총각네 야채가게’ 제작사 ‘라이브’ 강병원 대표도 저와 같은 뿌리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어려워도 번역극을 안하잖아요. 그 것 외엔 강대표나 저나 평범한 보통사람입니다.
영화 ‘지렁이’의 마지막 내레이션이선 아비의 마음 속 소리가 흘러나온다. ‘구름 같은 사람도, 바람 같은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이다...아버지가 마시는 술잔은 술이 아닌 눈물이었다.’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걸까요. 그 멘트만 원술이 정상적인 목소리로 말을 해요. 영화 속에선 결국 딸한테 들려주지 못한 목소리이지만 이 마음으로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줬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어요.”
한편, 영화 ‘지렁이’는 장애인 인권 문제를 다루고, 성폭력 피해 문제를 장애인의 날(4월 20일)에 개봉했다.
/서경스타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