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장애인의날]서울법원청사 406호에서 열린 “조용한 재판”

장애인의 날 맞아 농학교 학생들 법원 방문

법복 입고 모의 재판, 판사와의 대화까지

"직업 교육 적은 장애 학생들, 법조인 꿈 키우길"

서울고등법원이 20일 서울농학교 학생들을 서울법원종합청사로 초청해 개최한 모의 법정에서 농학교 소속 서정원(21·오른쪽 네번째) 학생이 ‘닌텐도 게임기 절도 사건’의 변호인을 맡아 변론하고 있다./신다은 기자서울고등법원이 20일 서울농학교 학생들을 서울법원종합청사로 초청해 개최한 모의 법정에서 농학교 소속 서정원(21·오른쪽 네번째) 학생이 ‘닌텐도 게임기 절도 사건’의 변호인을 맡아 변론하고 있다./신다은 기자




“사건번호 2017고합1호 별표 사건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법복을 입은 재판장 역할의 이시진(19)씨가 엄숙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펼쳐 좌중을 진정시켰다. 재판장과 좌·우배석 판사가 양손을 쥐고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리자 수화로 진행되는 재판이 시작됐다. 피고는 친구의 닌텐도 게임기를 훔친 혐의로 기소된 한 고등학생. ‘장애인의 날’인 20일 서울법원종합청사 406호 법정에서 열린 모의 재판의 풍경이다.

서울고등법원은 이날 서울농학교 청각장애인 23명과 교사 7명을 초청해 법원 견학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날 행사는 수석부장판사와 현직 판사 2명, 전문 법정통역인 등이 참여해 학생들 견학을 도왔다. 학생들은 법정을 방청하고 판사·검사·속기사 등 재판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법관들의 지도 아래 모의 재판을 진행하며 법조인의 ‘맛’을 봤다.


1시간 남짓 걸린 모의 재판에서 증인, 변호사 등을 맡은 9명의 학생은 “친구들이 비슷한 기종을 갖고 있지 않냐” “닌텐도 기기 뒤에 송중기 스티커가 붙어있다던데 확인했냐”며 손가락 언어로 날카로운 법정 공방을 벌였다. 배심원들도 “닌텐도에 개인정보 있는지 확인해보라”거나 “백화점 CCTV를 열어 피고가 닌텐도 사는 장면을 돌려보자”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벌금 1,000만원을 구형 받은 피고 역할의 정진성(19)씨가 답답하다는 듯 양팔을 크게 흔들며 최후 변론할 때는 좌석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날 정씨에게는 “비슷한 스티커가 많고 확실히 (훔치는 걸) 봤다는 증인이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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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재판이 끝나고 법정을 나서는 학생들의 표정은 상기돼 있었다. 배심원을 맡은 김민주(20)씨는 “처음엔 모든 게 익숙지 않아 당황스러웠는데 판사의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잘 됐다”고 수줍게 대답했다. 좌은지(19)씨도 “제가 다 긴장이 되고 손에 땀을 쥐었다”고 말했다. 판사를 맡은 이씨도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판사 역할을 하려니 어려웠다”면서도 “직접 법정에 서니 가슴이 벅찼다”고 말했다. 여정규 서울농학교 교장은 “우리 아이들 생일인 장애인의 날을 맞아 학생들이 TV로만 봤던 곳을 직접 오다니 기쁘다”며 “서울고법 측은 사전에 학교를 방문해 직접 모의재판과정과 법률용어를 가르쳐 줬다”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학생들은 이후 ‘판사와의 대화’ 순서에서도 앞다퉈 질문하며 열띤 학습 분위기를 이어 갔다. 법원에서는 국가공인 수화통역사 자격을 갖춘 권형관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나와 학생들의 질문에 모두 답했다. 학생들은 권 판사가 과거 맡았던 사건에 대해 물었다. “법조인이 되려면 법학과에 가야하냐”며 법조인의 꿈을 살며시 보여준 학생도 있었다. 권 판사가 최근 농인(청각장애인)을 대상으로 사기행각을 벌인 ‘행복팀’을 예로 들며 유사수신행위 규제 법률을 설명하자 학생들은 한숨을 쉬고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권 판사는 “장애학생들은 다양한 직업교육을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며 “오늘을 계기로 학생들이 꿈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권 판사는 학교로 돌아가는 학생들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법조인 꼭 되세요. 오늘 만난 학생 중 한 분은 꼭 판검사나 변호사로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라요.”

신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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