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정책

[발언대]악의로 시작된 규제는 없다

김진억 금융투자협회 법무지원부장





모든 규제는 선의로 시작된다. 목적은 정당하고 기대되는 효과는 이상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한 선택지로 입법적 규제를 선호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부작용들이 나타나며 ‘규제=악’이라는 종착점에 도달하고 혁파 대상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지난 2010년부터 금융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 공론화되면서 관련 법안이 수차례 발의됐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친절한 국가, 후견인적 제도’를 지향하고 있다. 서민층과 노령층 등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와 보호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소비자의 성숙도를 고려하지 않는 보호는 규제과잉의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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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과잉은 입법의 합목적성을 저해하며 산업 성장의 장애요인이 되기도 한다. 19세 미만 청소년의 심야 시간 게임 이용을 금지한 ‘게임 셧다운제’가 시행된 뒤 청소년의 심야 게임 이용 감소율은 0.3%에 불과했으며 게임 산업이 위축된 것이 대표적이다. 자기 책임의 원칙하에 투자하는 자본시장의 소비자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은행시장의 소비자는 금융상품의 구매 목적, 금융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다르다. 그럼에도 모든 금융업권 소비자에게 유사한 규제 수준을 적용하는 것은 섬세하지 못한 규제 편의주의의 전형이다.

최근 금융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로보어드바이저·크라우드펀딩·블록체인 등 혁신을 거듭하며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논의되고 있는 법안은 과거 규정 중심의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한다. ‘규정 중심의 포지티브 규제’는 현재 상황에 충실할 뿐 미래에 대한 고민은 입법자의 법 개정에 의존한다. 나아가 금융회사는 촘촘한 규정 아래에서 면피를 위한 형식적 규정 준수에 집착하며 규제의 목적과 취지를 도외시하는 역설적 상황도 발생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복잡한 금융상품으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원칙 중심의 네거티브 규제’가 필요한 이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좋은 규제(good regulation)’에 관한 기준으로 △규제비용을 정당화할 편익을 창출할 것 △규제비용과 시장 왜곡을 최소화할 것 △혁신을 촉진할 것 등을 제시했다. 새로 도입될 금융소비자보호법은 ‘금융산업의 성장과 혁신’이라는 가치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 금융 산업과 시장은 금융소비자가 존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소비자 보호와 금융산업 발전 사이의 균형과 긴 안목이 필요하다. 교각살우의 우를 범하지 말자. 선의로 탄생한 법률이 개선 대상으로 변질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어떤 규제도 악의로 시작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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