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시각] 신의(信義)를 저버리지 말자

성행경 산업부 차장



기아자동차는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자동차 회사다. 1944년에 설립된 경성정공이 전신이다. 국내 최초로 자전거를 출시했고 지난 1974년에는 최초의 국산 승용차인 ‘브리사’를 내놓는 등 한국 자동차 산업에 큰 획을 그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심한 부침을 겪었다. 1980년을 전후해 수년간 적자를 내면서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승합차 ‘봉고’와 소형차 ‘프라이드’를 출시하면서 벌떡 일어섰다. 잘 달리던 기아차도 한국 제조업을 초토화시킨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결국 1997년 부도를 냈고 이듬해 국제입찰에서 현대그룹에 인수됐다. 2000년 현대자동차그룹에 편입된 후 디자인과 품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지난해 글로벌 시장에서 300만대를 판매하며 세계 10대 자동차 메이커로 자리매김했다.

현대차와 더불어 한국 자동차 산업을 대표하는 기아차가 외환위기 이후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에 따른 보복으로 중국 판매량이 반 토막 나는 등 판매 감소로 상반기 영업이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4%나 감소했다. 2012년 7.46%에 달했던 영업이익률도 올 상반기 3.0%로 절반 이하로 떨어지면서 경영에 빨간불이 켜진 상황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통상임금 소송이라는 장애물을 만나 시동이 완전히 꺼질 판이다. 기아차 노조는 상여금과 각종 수당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해주고 상여금 등이 포함된 새 통상임금을 기준으로 과거 3년간 받지 못한 각종 통상임금 연동 수당을 계산해 지급해달라고 요구하고 있고 사측은 지금까지 매년 임금협상을 벌이면서 상호 합의에 따라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지 않았던 만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31일 열리는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 1심 선고에서 법원이 어떤 판단을 할지 예단할 수는 없지만 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더라도 이전 임금을 새로 계산해 소급 지급하라고 할지다. 소급 적용할 경우 3조원이 넘는 추가 비용이 발생해 가뜩이나 실적 부진에 허덕이는 기아차는 당장 적자로 돌아선다. 특히 이번 소송 결과는 기아차뿐 아니라 200건에 이르는 다른 통상임금 소송에도 영향을 미쳐 기업들이 수십조 원의 비용을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럴 경우 가뜩이나 낡아 삐걱대는 한국 제조업은 통상임금이라는 돌덩이에 눌려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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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국내 기업들의 임금협상 과정에서 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오랜 관행이었다. 회사는 근로자와 그러한 신의(信義)를 바탕으로 각종 수당을 올려줬고 격려금 등의 명목으로 임금을 보전해줬다. 이제 와 상여금이 통상임금이라며 이전 임금까지 새로 계산해 더 달라는 것은 신의를 내팽개치는 행위다. 친구 사이에서도 신의가 중요할진대 하물며 연 매출이 50조원에 이르는 대기업 노사 간에는 말할 것도 없다. ‘권리 행사와 의무 이행은 신의를 좇아 성실히 해야 한다.’ 민법 제2조1항이다. 법원이 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saint@sedaily.com

성행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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