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저학년 때인 지난 1970년대 초 경주법주라는 술 광고가 여러 매체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서 기자는 한동안 보은에 있는 법주사를 법주를 만드는 양조장으로 알고 지냈다. 물론 그것도 초등학교 시절 얘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주사와 술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후로는 법주사와 관련된 글이나 사진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혼자 속으로 웃었다. 그 후 10여년이 흘러 대학 시절 법주사를 가봤는데 이 또한 30년 전이라 지금은 그 절에 관한 기억이 가물거릴 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지와 오해를 속죄하는 마음을 부여안고 보은으로 향했다. 물론 이번에는 술도가 대신 산속에 버티고 서 있는 대웅전을 기대하면서 길을 떠났다.
본래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분명한 나라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시나브로 봄·가을이 사라지더니 그 후로는 계절 중 여름과 겨울 둘만 남은 듯하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엊그제까지만 해도 햇살이 따갑더니 하루아침에 싸늘한 기운이 옷섶을 파고든다.
하지만 법주사 언저리의 속리산에는 아직 가을 소식이 멀었다. 쾌청한 하늘을 찌르고 선 나무들은 아직까지 푸른 잎을 굳건히 달고 있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인 5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한 절이다. 천축국(인도)에 유학 다녀온 의신은 경전을 나귀에 싣고 사찰터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속리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나귀가 요지부동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의신이 주변을 살펴보니 그곳이야말로 절을 세울 만한 자리였다. 그는 이곳에 절을 세웠고 부처님 말씀(法)이 머무르는(住) 자리라는 의미로 법주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니 법주사는 술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절이다.
이렇게 세워진 법주사는 외적의 침입 때마다 호국 도량의 본분을 다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승병들의 근거였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왜군들이 절에 불을 질러 전소 돼버린 것을 1624년 인조 때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주사에는 눈여겨볼 만한 보물들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한불교 조계종 5교구 본찰인 법주사에는 국보5호 팔상전, 국보55호 쌍사자석등, 국보64호 석연지 등 석 점의 국보를 비롯해 보물 13점, 유형문화재 28점 등 총 50여점의 문화재가 있다.
이 중 석연지는 돌로 만든 수조이나 이름에는 거창하게 못 지(池)자를 쓰고 있다. 석연지는 성덕왕 시절인 720년 조성된 것으로 원래 있던 자리는 청동미륵대불 앞이었다. 물을 담아 연꽃을 심어놓고 미륵보살에게 꽃을 공양하던 용도라는 설이 구전하고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팔상전은 부처의 일생을 8폭의 그림으로 나눠서 그려 놓은 그림을 모신 건물이다. 지금은 법당으로 쓰고 있지만 유일한 3층 목조탑이라는 희소성에 따라 국보로 지정된 것이다. 원래 화순 쌍봉사의 대웅전과 함께 둘뿐인 3층 목탑이었으나 쌍봉사 대웅전이 1984년에 화재로 전소한 후 복구되는 바람에 국보에서 제외되고 마지막 남은 목탑이 되고 말았다.
팔상전은 1968년 해체보수 때 부처의 사리가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리함이 나오면서 이 건물이 탑이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사리함은 현재 동국대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쌍사자석등은 높이가 3.3m가량인 석등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8각 석등인데 1962년 12월 국보로 지정됐다.
하지만 기자의 눈에는 이들 국보보다 철제 당간이 띄었다. 8도의 여러 절을 다녀봤지만 당간은 고사하고 당건석이 남아 있는 절도 드문 판에 법주사에는 철당간이 남아 당당히 하늘을 찌르고 있다. 다만 이 당간이 조성된 당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아쉽다. 법주사에는 원래 진표율사가 세운 철제 당간이 최근까지 있었지만 1866년께 당백전을 만들 때 조정에서 뜯어가는 통에 사라졌던 것을 후세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당간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불교유적으로 당이라는 것은 깃발을 의미한다. 원래는 절밖에 세워 부처가 있는 신성한 구역이라는 것을 알리는 표지였으나 법주사가 확장하면서 경내로 들어오게 됐다. 당간은 종파를 구분하는 깃발을 걸거나 절에서 열리는 행사를 알리는 게양대 역할을 하던 시설로 철당간 외에 나무당간·돌당간 등이 있는데 철당간은 안성 칠장사, 갑사 등 전국에 4개만 남아 있다.
속리산의 명물인 미륵불도 철당간을 뜯어갈 때 함께 뜯어갔던 것을 일제가 시멘트로 복원했다가 1990년 철거한 후 2000년에 청동으로 새로 조성한 것이다.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는 미륵불은 금박을 청동 위에 입힌 것으로 이에 소요된 금의 양이 무려 80㎏에 이른다. /글·사진(보은)=우현석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