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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워치-가벼워진 인문학]책으로…문화센터 강의로…대중에 침투하는 인문학

출판사 휴머니스트가 자체 제작하는 팟캐스트 프로그램인 ‘독자적인 책수다’에서 ‘시를 잊은 그대에게’의 저자인 정재찬(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 가수 요조, 박태근 알라딘 인문 MD,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가 녹음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제공=휴머니스트출판사 휴머니스트가 자체 제작하는 팟캐스트 프로그램인 ‘독자적인 책수다’에서 ‘시를 잊은 그대에게’의 저자인 정재찬(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 가수 요조, 박태근 알라딘 인문 MD,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가 녹음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제공=휴머니스트




40대 후반의 직장인 이명렬 씨는 최근 한 온라인 서점에서 한동일 바티칸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가 쓴 ‘라틴어 수업’(흐름출판 펴냄)을 스무권 가량 주문했다. 이달 말로 예정된 송년회에서 지인들에게 선물하기 위한 것. 이 책은 저자가 서강대에서 진행한 라틴어 수업 내용을 엮은 것으로 이 수업은 서강대생은 물론 다른 학교 학생과 교수들, 일반 수강생들까지 청강하러 찾아오는 명강의로 입소문이 났었다. 이 씨는 “굳이 라틴어를 배우고 싶지 않아도 유럽 언어의 뿌리에 해당하는 라틴어의 체계는 물론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화나 제도에 대해 총망라하고 있어 교양을 쌓기 좋은 책”이라며 “요즘은 나이를 불문하고 인문·교양서를 즐기는 이들이 많아 선물하고 싶었다”며 웃었다.


최근 3년간 꾸준한 인기를 끌었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비롯해, 문재인 대통령의 휴가철 추천도서로 주목받은 이후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명견만리’ 20~50대 다양한 연령층에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자존감수업’과 ‘라틴어 수업’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등의 공통점은 대중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인문·교양서라는 점이다. 최근 3년간 불어오는 ‘스낵 인문학 열풍’은 인문도서 분야의 공급과 수요가 두터워지는 선순환구조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출판계의 설명이다. 팟캐스트, 블로그 등을 통해 활동하던 재야의 고수들이 출판계로 유입되며 인문·교양서 시장에 젊은 저자들이 수혈됐고 여기에 대학의 교양강의를 풀어쓴 대중용 저술, 강의와 예능을 접목한 렉처테인먼트가 출판물로 소화되면서 독자와 저자의 간극이 좁아진 결과다.

한국보다 앞서 입문용 인문·교양서 시장이 발달한 곳은 일본이다. 지난 9월 길벗출판사가 출간한 ‘30분 시리즈’는 철학, 경제학, 경영학, 회계학 등 다양한 학문을 한 권의 책으로 배우는 콘셉트의 교양서. 지난해 일본에서 출간한 ‘30분 시리즈’는 출간 1년도 안 돼 각각 누적 20만~30만부 이상이 판매되며 돌풍을 일으켰다. 목차에서부터 꼭 봐야 할 부분만을 꼽아주고, 주요 내용을 요약하고 난이도를 도식화한 편집은 마치 중고등학생 시절 참고서와 유사한데 이 시리즈의 특징은 각 분야를 대표하는 대학 교수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길벗 출판사 이지현 에디터는 “국내에선 대중 교양서를 집필하는 대학 교수를 찾기 힘들지만 일본 출판물에서는 마치 참고서를 쓰듯 지식을 요약하고 도식화한 책들을 내는 교수들이 많다”며 “앞으로는 국내 대학교수들을 필진으로 참여시켜 ‘30분 시리즈’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어쩌다 어른’, ‘명견만리’처럼 방송에서 먼저 인기를 끈 인문학 강연을 그대로 책으로 옮기는 것 역시 일본에서 일찌감치 자리 잡은 트렌드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강상중 전 도쿄대 교수의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도 모태는 일본 NHK 방송사의 TV 프로그램이었다. 강 전 교수가 ‘직업 특강’이라는 방송에서 대중들에게 전한 인생철학으로서의 직업론이 반향을 이끌어내자 똑같은 콘셉트의 콘텐츠가 제목만 바꿔 달고 서점에 진열된 것이다.

이처럼 방송의 영향력을 등에 업은 ‘스낵 인문학’ 시장이 출판계를 강타하면서 인문학 서적을 주로 찍어내는 출판사들도 팟캐스트를 독자와의 접점을 늘리는 통로로 적극 활용하는 추세다. 출판사가 직접 방송을 제작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한 만큼 자사가 펴낸 서적에 대한 A부터 Z를 팟캐스트에서 상세히 짚으며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회사가 휴머니스트다. 이 회사는 지난 2014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으로 쏠쏠한 재미를 본 뒤 현재 ‘독자적인 책수다’라는 팟캐스트 프로그램을 따로 만들어 자사의 도서를 청취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황서현 휴머니스트 편집주간은 “예를 들어 챕터가 10개라면 한 주에 한 챕터씩 저자가 직접 책을 씹어먹듯 설명해 주는 방송”이라며 “청취자들의 호응이 실제 도서 판매량으로 이어지고 있어 앞으로도 팟캐스트의 퀄리티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가볍게 즐기는 인문학 시장의 수요가 만만치 않다는 점을 간파한 서점들도 명사를 초빙한 오프라인 강연을 고객층 확대의 무기로 삼고 있다. 교보문고는 올해 3월부터 ‘인문학 석강(夕講)’이라는 테마를 시리즈로 기획해 선보이고 있다. 프로그램 역시 독도 문제와 우주 과학, 문학 등으로 매우 폭넓다. 지난 9일 ‘소설가의 자화상’을 주제로 열린 장강명 작가의 강연에도 220명이 넘는 청중이 몰려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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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와 에어로빅 댄스 등 주부를 대상으로 한 취미 일변도에 머물렀던 백화점 문화센터의 강연도 분야를 인문학 전반으로 빠르게 확장하는 모습이다.

최근 3년 동안 인문학 강좌의 수를 매년 20%씩 늘린 롯데백화점은 현재 33개 점포에서 총 500여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현대백화점도 지난 가을학기 대비 올 겨울학기의 인문학 강좌 수를 20% 가량 늘려 편성했다. 지점별로는 평균 30개의 인문학 강좌를 진행 중이다. 신세계백화점에서도 이번 겨울학기에 강남점·대구점·센텀점을 중심으로 인문학 관련 강좌가 지난해보다 10% 정도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경연 신세계 아카데미 파트너는 “매년 인문학 강좌에 대한 문의가 늘어나는 추세”라며 “고객들의 요구에 부응해 인문학 강좌를 더 많이 개설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인문학 강좌에 대한 고객들의 반응이 뜨거워지자 백화점들은 스타 강연자들을 내세워 인문학 강좌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현대백화점에서는 올 겨울 KBS 인문학 강연 프로그램인 ‘명견만리’를 기획하고 직접 취재한 PD들이 직접 강연자로 나서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판교점과 대구점에서 8회에 걸쳐 진행되는 강좌는 ‘정답사회와 일자리의 미래’ ‘4차 산업혁명은 어떤 인재를 원하나’ 등의 제목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친 강연이 진행된다. 이 외에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미술 평론가의 ‘한양 5성과 5대 궁궐’을 다루는 강연도 이번 겨울학기 압구정 본점에서 진행된다. 롯데백화점은 구리점에서 오는 25일 배상훈 프로파일러를 초청해 사이코패스 범죄 등 프로파일링 사례를 통해 범죄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돕는 강연을 진행한다.

신세계백화점은 올 겨울 전국 일부 지점에서 ‘스페셜 토크’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한다. 김요비, 이정현, 신용목 등 시인과 ‘연탄길’의 저자로 알려진 이철환 작가가 전국의 신세계백화점 지점을 돌며 문학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외에도 이세돌 9단의 바둑 스승으로 알려진 권갑용 바둑도장 대표의 집중의 즐거움을 통해 불안함과 급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주제로 한 강연, 김연수 푸드테라피스트와 함께 화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강연 등이 진행된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기본적으로 인문학은 특정 계층이나 연령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의 삶과 감정을 다룬 학문이기에 잠재적인 수요가 넓다고 봐야 한다”며 “인터넷·통신기술 등의 네트워크로 사람과 정보를 잇는 ‘초(超)연결 사회’에서 대중과 인문학을 잇는 고리 역할을 하려는 방송가와 출판계의 노력은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일각에서는 인문학의 탈을 쓴 ‘인스턴트 지식’이 범람하는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옥균 리더스가이드 대표는 “인문학을 손쉽게 ‘다이제스팅’하는 분야에 시장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정 부분 누락이나 왜곡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며 “최근 들어 시집을 찾는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도 단순히 가을이라는 계절적 요인을 떠나 ‘스낵 인문학’ 열풍 속에서 정갈하고 단정한 문학적 소양을 쌓고 싶어하는 독자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서은영·나윤석·변수연기자 supia927@sedaily.com

서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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