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춘 전 국가보훈처장. 기자로서 일하면서 그에 대한 기억은 한 가지다. 불통. 대외적으로 소통하려는 노력을 거의 못 봤다. 최장수 처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보훈처 대변인이 기자들에게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사라진 적도 있다. 기관장이 언론을 멀리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 박 전 처장의 6년3개월 임기 동안 무수히 일어났다. 2017년 12월19일. 영원할 것 같았던 그의 권력이 부서지는 포말처럼 사라진 게 실감 난다. 보훈처가 그를 검찰에 넘겼으니까. 혐의는 많다. 직무 방기에서 불법 방조까지. 국가정보원이 들춰낸 그의 위법·위규 사실도 가볍지 않다. 혹자는 주장할 수도 있으리라. 나라를 위해서 그랬노라고. 과연 그럴까. ‘함께하는 나라사랑’이라는 재단의 이사장은 자기가 운영하던 회사에 세 차례에 걸쳐 29억5,506만원을 빼돌렸다. 애국을 내걸고 뒤로는 검은 뱃속을 채우는 동안 박 전 처장은 뭘 했나. 분명히 그에게는 책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훈처의 행태는 고약하다. 보훈처는 다섯 가지 비리 사실을 적시하며 박 전 처장과 최 전 차장을 검찰에 수사 의뢰하겠다고 밝혔다. 죄가 있다면 마땅히 받아야 한다. 문제는 자세다. 보훈처는 “피우진 처장, ‘엄정한 공직기강 확립’으로 개혁 의지 천명”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보훈처가 한 게 무엇이길래? 직접 조사한 적이 있었나. 국정원 개혁위의 권고사항을 따랐을 뿐이다. 정작 일한 것은 없으면서 피 처장의 공적으로 치장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더욱 큰 문제는 ‘각종 비리를 일부 공무원의 일탈행위’라고 못 박았다는 점이다. 비겁하다.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신념과 보수 노선을 부각시키려는 박 전 처장의 눈치를 살피고 숨죽이고 살아온 처지에 ‘일부의 일탈’이라니. 염치없는 일이다. 단테의 신곡에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을 ‘하나님에게 순종하지도 않았지만 반항하지도 않은 불쌍한 영혼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학자들은 이를 ‘지옥이란 격변기에 중립을 지켜온 자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라고 풀이한다.
강자가 시키는 대로 죄의식도 없이 무작정 행한 행위가 일반적일 수도 있다. 유대계 여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런 현상에 ‘악의 보편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혼 없는 공무원’과 ‘악의 보편성’의 결합은 국가의 해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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