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신문이 금융권 고위임원 14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는 현 정부의 기조대로라면 내년 경영환경이 악화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KB금융과 신한금융 등 올해 국내 금융사 실적이 사상 최고를 기록했지만 내년 전망은 굉장히 부정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시장원리에 역행하는 금리나 수수료 등 가격개입에 대한 우려는 전체 응답자의 절반(50.7%)을 차지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19일 설문조사 결과 금융권 입원들은 금융산업의 성장을 막는 장애물로 이구동성으로 ‘금융당국의 지나친 규제’ ‘정치권의 포퓰리즘에 동원’ ‘노조의 입김’ 등을 꼽았다. 이는 관치(官治)와 정치권 개입을 의미하는 정치(政治), 노조가 경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식의 노치(勞治) 등 이른바 3치(治)가 금융산업 경쟁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경고인 셈이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금융정책 가운데 시장의 자율을 침해하는 정책에 대해서도 강한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시장자율 침해 정책의 대표적 사례로 장기소액연체자 빚 탕감이라는 답변이 49.6%에 달했고 카드 수수료 인하(47.4%)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44.5%)라는 의견도 5명 중 2명 이상이었다. 그 외에 실손보험료 인하(27.7%), 법정 최고금리 인하(21.2%)와 같이 보험·카드·저축은행 등 개별 업권마다 논란이 되는 정책이 지목됐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정적 인식이 높아지고 규제 움직임이 계속 강화됐다”면서 “금융산업 지원 없이 금융회사를 도구화하면서 정책효과까지 퇴색시킨다”고 말했다.
내년 경영환경에 가장 위협적인 요소로는 금리 상승에 따른 취약가계·기업의 동반부실(43.9%)을 꼽았다. 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우려한 것은 당국의 규제(31.7%)였다. 그만큼 당국의 개입에 따른 우려가 금리 인상으로 예상되는 경영 위협과 맞먹을 정도로 크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한 금융권 최고경영자(CEO)는 “은행이 돈을 벌 수 있을 때 돈을 벌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리 인상으로 가계·기업 부실이 커지면 그만큼 충당금도 더 쌓아야 해 손실을 만회할 수준의 버퍼(이익)가 필요하다. 그런데 은행이 돈을 못 벌게 각종 규제를 들이대면 경영진은 줄어든 실적을 만회하려고 결국 고정비를 축소하기 위해 감원 등 인적 구조조정을 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이렇다 보니 KB금융과 신한금융은 3·4분기까지 누적 순이익이 각각 2조7,577억원, 2조7,064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지만 글로벌 경쟁력은 한참 부족한 실정이다. 선진국과의 직접비교는 어렵지만 이웃 일본의 금융권과 비교해도 크게 앞서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핵심 수익지표인 자기자본수익률(ROE)은 KB금융 10.83%, 신한금융 11.5%, 하나금융 8.94%, 우리은행 9.05% 등 10% 내외로 15%를 상회하는 미국과 아시아 주요 금융사에 비하면 역부족이다. 각종 국제경쟁력지수에서도 국내 금융산업은 노동 분야와 함께 순위를 떨어뜨리는 ‘미운 오리’가 되고 있다는 자성이 나온다.
내년에 금융권이 가장 주력할 분야로는 디지털 전환(84.8%)이 꼽혔다. 4차 산업혁명과 카카오뱅크 같은 인터넷전문은행의 등장에 따라 비대면 경쟁이 치열해지는 현실이 여실히 녹아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함께 글로벌 경쟁력 제고를 위한 해외진출 강화(38.4%), 비이자이익 증대를 꾀하는 자산관리(WM) 강화(28.3%) 및 투자은행(IB) 강화(17.4%) 등의 고민거리가 담겼다. 어떻게 보면 최근 KB금융과 신한금융 등 주요 지주사가 ‘디지털·글로벌·비이자이익’ 등에 주력하겠다고 내년 경영계획을 확정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그 밖에 올해 주요 금융사와 민간금융협회에서 이뤄진 새 CEO 선임 과정이 얼마나 투명하고 공정한지에 대한 질문에 보통(46%)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고 공정하고 투명(25.9%), 불공정하고 불투명(23.7%)하다는 응답이 엇비슷해 CEO 선임이 아직 관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인식됐다. 금융사 지배구조 개선과 관련해서는 임직원이 체감하도록 상시 승계 프로그램 운영(60.6%)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가장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