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K바이오 골든타임 잡아라]신기술 있어도 허가까지 2년...출시땐 '한물 간 기술' 전락

< 하 > 규제 풀어야 시장 보인다

의료용 로봇·이동형 CT기기 등

규제 가로막혀 반쪽 활용 그치고

유전자 검사·빅데이터 서비스도

까다로운 규정에 개발 쉽잖아

기술 발전 속도와 법 괴리 심각

범부처 차원 규제개선 노력 필요





의료용 로봇을 개발한 A 기업은 2014년 보행 재활로봇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지만 판매에 고전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재활을 돕는 로봇은 현재까지 병원 7곳에 판매된 게 전부다. 로봇이 신의료기술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기존 급여 수가(1만2,500원)를 적용받기 때문이다. 병원 입장에서 수가도 낮은 데 굳이 수 천만원대의 로봇을 살 이유가 없다. 로봇을 구입한 병원도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신기술 활성화를 위한 국책 연구과제로 지원받아 판매가 성사된 곳들이다. A 기업 관계자는 “기존 재활치료사가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는 이유로 의료기기 허가는 통과했으나 신의료기술 평가는 받지 못했다”며 “한쪽에서는 신기술이라며 지원하고 다른 쪽에서는 신의료기술로 인정하지 않는 엇박자 정책에 답답할 뿐”이라고 토로했다.


바이오·의료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는 데 비해 법 체계는 제자리걸음이다. 겹겹이 쌓인 규제에 가로막혀 업계가 제품을 개발해도 국내 시장에서 팔지 못하는 상황이 다반사다. 힘들게 기술을 개발한 기업들이 국내에서 판매 실적을 쌓지 못하면 해외 수출길도 뚫기 어려워 한국 바이오·의료 업계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규제를 풀어 시장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신의료기술평가 제도는 로봇, 인공지능(AI), 가상·증강현실(VR·AR) 등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의료기기 업계에서 개선을 촉구하는 대표적인 규제다. 현행법상 의료기기를 판매하려면 먼저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기술에 대한 안전성, 유효성, 임상결과 등을 기준으로 인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후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한국보건의료연구원에서 신의료기술 여부를 확인하고 평가한다. 기존 기술로 인정되면 보험 급여 심사로 넘어가지만 신의료기술로 인정되면 연구원의 평가를 거쳐야 급여 심사로 넘어갈 수 있다.


업계는 하루가 멀다하고 신기술이 나오고 있는 요즘 상황에 비춰볼 때 최종 허가까지의 시간이 지나치게 길고 기준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심사를 위한 준비부터 승인까지 통상 2년가량 걸리면서 개발 당시 신기술이었으나 출시 단계에서는 이미 구(舊) 기술이 돼버린다는 이유에서다. 업계 관계자는 “신의료기술을 평가하는 전문위원회 위원들이 의료기기의 특수성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췄는지 잘 모르겠다”면서 “이미 식약처에서 평가한 제품을 다시 해외 논문을 근거로 재평가하는 경우도 있다”고 답답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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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복지부·식약처에서 관련 부처 간 정보 연계 및 통합 심사 실시, 사회적·임상적 가치를 반영한 평가 트랙 마련 등의 제도 개선을 예고했으나 업계에서는 체감도가 낮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관련 규제를 개선하려고 협회 차원에서 많이 건의했다”면서 “기존에도 부처에서 개선안을 내놓았지만 업체 입장에서는 아무런 효과를 못 느꼈다”고 지적했다.

바이오 산업 규제로 인한 사업 차질은 대기업이라고 예외가 없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이동형 컴퓨터단층촬영(CT) 기기 ‘옴니톰’을 개발했으나 법에 묶여 ‘반쪽 활용’에 그치게 됐다. 옴니톰은 거동이 불편해 CT 촬영실로 이동이 어려운 중환자, 응급환자 등을 겨냥해 환자가 있는 곳으로 기기를 이동해 촬영이 가능하도록 디자인됐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령에 근거해 국내에서는 기기를 응급실, 중환자실에서 사용할 수 없다. 이동형으로 제작된 단층 촬영장치의 경우 수술실에 한정해서만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앞서 출시한 미국에서는 응급실, 수술실에서도 사용 가능한 것과 대조적이다. 방사선이 외부로 누출되지 않도록 방어시설을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법이 마련됐지만 변화한 기술 환경을 반영하지 못 하고 있다는 게 업체들의 주장이다.

언제 어디서나 타액, 혈액, 소변 등으로 편리하게 질환을 진단받는 유전자 검사 역시 국내에서 제품 개발이 쉽지 않다. 체질량 지수, 카페인 대사, 혈압, 혈당, 피부노화, 색소침착, 모발 굵기 등 12가지 종류로 제한할 뿐만 아니라 항목별 검사할 수 있는 유전자도 제한하기 때문이다. 가령 지난해 영국에서 최소 250개의 유전자가 남성형 탈모를 일으킨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지만 한국은 단 4개 유전자에 의한 탈모 검사만 진행할 수 있다. 주무 부처인 복지부에서는 해외 논문과 교차 비교해 정확도가 입증한 유전자만으로 제한했다는 입장이지만 업계에서는 불만이 높다. 유전자 진단 스타트업인 쓰리빌리언의 금창원 대표는 “기술력으로 더 나은 검사가 가능하고 소비자에게 더 좋은 질의 검사를 줄 수 있는데도 지나치게 촘촘한 규제에 막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의료 분야에서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방안도 갈 길이 멀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를 활용해 개인별 맞춤형 건강 관리가 충분히 가능하지만 개인정보보호법으로 인해 의료 데이터를 충분히 활용할 수 없다. 자기공명영상(MRI)과 CT 등 사진, 동영상은 사실상 익명화가 어렵고 희귀 난치성 질병일수록 환자 수가 적어 익명화가 불가능하다. AI 진단 소프트웨어(SW)를 개발하고 있는 S사의 한 관계자는 “미국에서는 바이오 스타트업들이 대형병원의 영상 데이터를 활용해 AI 진단의 정확도를 겨루는 대회도 활발하다”며 “한국에서는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고 꼬집었다.

이처럼 신성장동력인 바이오·의료 분야가 규제로 가로막혀 있다는 지적이 높아지면서 정부도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최근 정부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농림축산식품부, 산업통상자원부, 복지부, 식약처, 해양수산부 등이 모여 ‘바이오 규제개선 신문고’를 운영하고 현장과 소통 강화에 나섰다. 벤처기업협회,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등도 데이터 개방 서명운동을 펼치는 등 민간 영역에서도 규제 개선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바이오 분야 스타트업을 투자·심사해온 벤처캐피털 업계의 한 관계자는 “바이오의 경우 사람의 생명이나 건강과 직결된 분야이니 만큼 다른 분야에 비해 높은 수준의 규제를 적용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문제는 바이오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각종 법 체계는 한참 이전에 마련돼 현재 기술이나 시장의 흐름과 동떨어진 측면이 많아 보다 적극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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