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칼럼] 퇴계사상이 한일관계사에 미친 영향은

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퇴계 이황은 누구나 다 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의 이름 말고 인생과 철학을 아는 이는 보기 힘들다. 그의 인생과 철학이 역사(특히 한일관계사)에 미친 영향을 안다면, 지금까지의 우리 인식은 크게 달라져야 한다.

이황은 34세 때 문과에 합격했으니 수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다 벼슬아치로서 눈치 없이 당대의 권력자인 김안노와의 만남을 거절하고, 무엄하게도 임금에게 흉년이라며 반찬 가짓수를 줄이라고 직언하는가 하면, 흉년에 궁궐살림은 외면하고 백성들에게 곡식을 내리라고 목청을 세웠으니, 시쳇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뿐인가? 사량진왜변으로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됐음에도 조정중론을 무시한 채 원칙과 현실을 앞세워 일본과의 강화를 상소하고, 무도하게도 대마도주와 일본막부의 장군에게 답서를 썼다.

아니나 다를까? 이로 말미암아 다음 해의 을사사화(1545년) 때 삭탈관직을 당했다. 그렇지만, 하도 청렴해서 털어봤자 별 허물이 없자 관직은 곧 복구된다. 그러나 한 번 식겁을 한 그는 중앙의 요직을 마다하고 단양군수와 풍기군수 등의 외직을 자청했다.


지방에서의 행적은 양반들의 심기를 더 거슬렸다. 지체 높은 군수의 몸으로 천하고 어린 몸종인 두향과 시문을 논하고 한글편지로 연심을 나누는가 하면, 죽은 서방을 따라 죽으려는 질부를 말려 가문의 열녀탄생을 막고, 체면에 연연하지 않고 과부가 된 며느리를 재가케 했으며, 병든 아들과 조카에게 상중에 고기를 먹게 했다. 게다가 계급적 질서를 무시하고 천한 대장장이 배순에게 글을 가르치는가 하면, 체통 없이 26세나 어린 기대승과 ‘사단칠정론’이라는 철학논쟁에 빠지고, 격식을 저버리고 36세나 어린 이율곡과 토론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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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보니 그는 100번이 넘도록 관직에 임명되어 근 80번을 사직했다. 그러면서 사재를 털어 고향에 서원을 세우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이로 인해 유성룡과 김성일을 비롯해 국난극복에 앞장선 인재들을 키웠지만 궁극적으로 그의 인생과 철학은 계급적 특권을 고집하는 양반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이 때문에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아는 게 있으면 행해야 한다)과 철저한 현실론에 입각한 그의 철학은 조선에서 무시되고, 이웃나라 일본으로 건너가 꽃을 피웠다.

전쟁의 원흉인 토요토미 가문을 없앤 도쿠가와 막부는 퇴계의 실용적 평등애민사상을 과감하게 도입해 정치와 민생을 안정시켰다. 이에 반해 조선은 계급적 특권유지를 고집하여 퇴계의 사상을 배격하는 바람에 정치는 경직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그로부터 250여년 후 서세동점의 시대가 오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비롯한 일본의 애국자들은 퇴계를 본받아 공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고향에서 사재를 털어 후진양성에 나섰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에 성공한다. 그렇지만 조선은 백성의 자발적 봉기(동학혁명)에도 불구하고 관의 집요한 방해로 개혁이 실패하는 바람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쟁터로 변했다.

일본의 유신성공과 조선의 개혁실패는 반만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일본의 국력이 한국을 앞지르는 계기가 됐다. 이를 보면 요시다 쇼인의 사상이 근대사에 미친 영향은 크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그의 사상은 퇴계의 실용적 평등애민사상에 섬나라의 조급함과 소외감을 결부시킨 속 좁은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사상에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럼에도 일본의 현 수상인 아베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주저 없이 그를 꼽으면서 일본의 군국화가 가능하도록 평화헌법개정에 정치적 생명을 걸고 있는바, 이는 아베에게 뚜렷한 정치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다수 일본인의 공감을 받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쇼인의 사상은 일본의 현대사를 왜곡하고, 국제평화를 유린했다. 이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다름 아닌 패전국 일본의 국민이었다. 이런 역사를 본다면, 일본은 전쟁광인 토요토미 가문을 멸한 뒤 250여년 동안 정치를 안정시키고 민생을 살찌운 도쿠가와 막부를 지탱한 퇴계 사상의 가치를 깊이 되새겨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래야만 일본은 진정한 우리의 이웃이자 지구촌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제발 좀 똑바로 알자./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조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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