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국방제도로서 지역과 중앙이 조화된 방어개념인 진관(鎭管)체제는 왕조수립 100년이 지나면서 급격히 무너져 내렸는데, 그 원인은 민생파탄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고갈이었다.
조선은 인구의 1할이 지배층(양반)을 이뤄 재산과 권리를 독식한데다 양반 인구의 2~3배에 이르는 노비들을 양반을 위한 도구로 만들었다. 그렇다 보니 나라를 유지하는 비용은 오롯이 인구의 절반이 조금 넘는 가난한 백성들의 몫이었다. 그런데다 계급적 특권의 유지를 위해 경제활동을 중심으로 한 백성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화폐주조마저 금지해버렸으니 민생과 재정의 파탄은 처음부터 예고된 재앙이었다.
그럼에도 양반들은 계급적 특권을 끝끝내 포기 않았고 나중에는 국방을 이용해 국가재정을 지탱했는데, 이것이 바로 방군수포(放軍收布)였다. 방군수포란 한양을 지키는 군사에게는 수포대립(收布代立·면포나 쌀을 주고 다른 사람을 군에 복무시킴)을 허용하고, 지방의 진(鎭)과 영(營)에 소속한 군사에게는 면포나 쌀을 내게 하고 군복무를 면제하는 제도였다.
그런데 상공업의 억압으로 세월이 갈수록 경제와 재정이 파탄나는 바람에 방군수포의 규모는 점점 확대됐고, 이 때문에 지방에서는 군부대를 유지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러자 조정은 당장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심정으로 진지한 논의도 없이 진관체제를 포기하고, 제승방략(制勝方略·적의 외침 시 각 요새의 군사들은 일단 후퇴해 중앙에서 지시한 장소에 모인 후 중앙에서 파견한 장수의 지휘에 따라 전투를 치르는 전략)으로 제도를 바꾸었다. 그러나 제승방략은 임진왜란 초기 육전의 상황에서 보듯 적의 외침 시 최일선의 군사로 하여금 싸움을 포기하고 일단 도망치라는 말과 다를 바 없는 비현실적 전략이었다.
임진왜란 전 나라를 걱정하는 신하와 백성들은 왜군의 침공가능성을 미리 알고 제승방략의 폐단을 지적했다. 그러나 조선의 왕은 그 폐단을 알면서도 고칠 수가 없었다. 제승방략을 폐지하고 다시 진관체제로 돌아갈 경우 방군수포를 중단해야 했고, 그럴 경우 나라에서 관리들의 녹봉을 지급할 능력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잔뜩 짜증이 난 왕은 백성들에게 엄격한 함구령을 내리고, 왜군침공에 대해 입만 뻥긋해도 무자비한 형벌을 가했다.
임진왜란 때 육군과 달리 수군은 싸울 때마다 승리했다. 수군은 중앙의 정치로부터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간섭을 덜 받는 바람에 제승방략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이 그 큰 이유였다. 그러나 단 한 번 칠천량에서 치욕적 패배를 당하는데, 이는 당시 갓 부임해서 전선의 상황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해군지휘관 원균에게 곤장을 쳐서 치욕을 안긴 후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진격하라고 강제한 중앙의 무모한 명령 때문이었다. 이를 보면, 지역과 현장을 외면한 중앙의 통제만큼 나라에 해로운 게 또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국방이 먼저인가? 민생이 먼저인가?’라는 문제는 요즘도 논란이 된다. 국방이 먼저인지, 민생이 먼저인지 선뜻 대답하기 어렵지만, 역사를 통해 분명한 것은 민생에 소홀한 국방은 모래 위의 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민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