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들이 ‘저녁 있는 삶’을 강조하며 PC오프(off)제, 자율출퇴근제 등을 잇따라 도입하고 있지만 아직 ‘그림의 떡’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제도만 만들어놓고 권장하는 데 그쳐 실효성이 떨어지는데다 일선 영업점에서는 시간외수당을 제대로 못 받는 문제까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8일 금융권에 따르면 신한은행의 PC오프제는 연장근로를 하고도 수당을 받을 수 없는 맹점을 갖고 있다. 신한은행 PC오프제는 오후7시부터 업무용 컴퓨터에 화면보호기가 뜬 뒤 다시 로그인을 해야 하고, 야근한 후 일을 마치면 더 일한 시간만큼이 컴퓨터에 저장된다. 이튿날 본인이 알아서 전날 밤 연장근로시간을 인사전산에 등록하는 방식이다. 만약 전날 3시간을 야근했어도 1시간만 추가 근무했다고 축소해 등록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직원들의 컴퓨터를 바로 종료시켜 칼퇴근을 장려하는 것이 아닌 근무시간 측정용으로 사용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한은행 직원 A씨는 “월말이나 신상품 출시가 있는 날 야근하는 것은 당연한데 수당 신청하기가 눈치 보인다”며 “지점장들도 추가 수당 신청이 본인의 지점에서만 많이 나오면 본점의 눈치가 보인다고 한다”며 하소연했다.
신한은행은 또 지난해 8월부터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정하는 ‘자율출퇴근제’를 도입했지만 직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느라 매달 쓸 수 있는 6회를 다 채우지 못할뿐더러 근무시간이 들쑥날쑥하다 보니 비효율적이라는 불만이 나온다. 이에 따라 노사가 제도 수정을 조율하고 있다.
KB국민은행의 경우 지난해 10월부터 오후6시 퇴근을 원칙으로 하되 7시 이후 야근을 하려면 야근 신청을 하도록 했다. 오후7시 이후 업무용 컴퓨터 사용은 지점장이 승인해야 가능하다. 하지만 국민은행 직원 B씨는 “지점장에게 야근을 허락받고 늦게 퇴근한 뒤 다음날 출근해보니 전날 야근 승인이 반려된 경우를 종종 봤다”고 전했다. 제도적으로 ‘저녁 있는 삶’은 보장하지만 현장에는 적용되지 못하는 셈이다.
KEB하나은행은 시간외수당 미지급 사례가 빈번하자 노조 측에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하나은행 직원 C씨는 “사측의 적극적인 야근 지양 캠페인에도 영업점 창구에서는 오후6시 넘어서까지 업무를 보고 마감을 해야 하는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며 “본점과 달리 일선 영업점에서는 지키기 쉽지 않고 6시에 퇴근을 하게 되면 아침에 더 일찍 출근하는 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은행권의 사례들을 볼 때 오는 7월부터 시행되는 주52시간 근무가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본점과 일선 현장 직원 모두 체감할 수 있도록 제도 정착이 우선돼야 한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시중은행 관계자는 “‘저녁 있는 삶’이나 ‘워라밸’ 기조가 나온 것은 지난해이고 그에 맞춰 은행들이 새로운 제도들을 내놓고 있다”며 “제도가 시행된 시점과 효과가 나오기까지는 시간 격차가 있는 만큼 일단 두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