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호르무즈해협

1988년 7월3일 테헤란 공항을 이륙한 이란항공 655편이 승객과 승무원 290명을 태운 채 호르무즈해협 위를 날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25분 후 두바이공항에 안착할 터였다. 같은 시각 SM-2R 지대공미사일을 장착한 미국 미사일순양함 USS빈센스호도 자국 헬기를 사격한 이란 고속단정을 추격해 해협으로 들어섰다. 비극은 갑자기 일어났다. 빈센스호가 돌연 655편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한 것. 탑승자 전원 사망의 참사였다. 그럼에도 미국은 희생자들에게 6억6,800만달러의 보상금만 줬을 뿐 어떤 책임과 사과도 거부했다. 해협에 울린 것은 희생자 유족들의 통곡뿐이었다.






10세기 도시국가 오르무즈(Ormuz) 왕국이 지배한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호르무즈해협은 원래 풍요의 바다였다. 해협 북동쪽 호르무즈섬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해상무역의 발달로 ‘세계가 금반지라면 이곳은 반지에 박힌 보석’이라고 지칭됐다. 거리에는 매트와 카펫이 깔렸고 집은 금 꽃병이 새겨진 가구와 향기로운 식물을 담은 도자기들로 가득 찼다고 하니 그 화려함을 짐작할 만하다. 명(明)의 대함대를 이끌었던 정화와 마르코 폴로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여행·탐험가들이 이곳을 기착지로 삼은 것도 당연했다.


부와 풍요의 바다를 다른 나라들이 가만히 둘 리 없다. 포르투갈이 1507년부터 100년 넘게 오르무즈왕국을 점령하면서 해협을 지배했고 뒤이어 영국이 이 지역을 차지했다. 1979년 이란혁명으로 친미 팔레비 왕조가 무너진 후에는 필수적 에너지원인 석유의 안정적 수송로를 확보하려는 미국과 반미 이슬람 혁명정권이 장악한 이란 간에 대립과 충돌이 빈발했다. 풍요의 해협이 갈등의 바다로 이름을 바꾸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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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해협에 다시 긴장이 감돌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협정 탈퇴를 선언하고 다시 제재에 나서자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도 “원유수출을 막으면 미국은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라며 해협 봉쇄 가능성을 시사했다. 호르무즈해협 폭 50㎞ 중 원유수송선이 이용할 수 있는 바다 폭은 불과 3㎞. 이 좁은 통로를 봉쇄하는 것은 이란의 표현대로 ‘식은 죽 먹기’다. 해상으로 수송되는 원유의 30%가 옴짝달싹하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가뜩이나 삶이 팍팍해진 우리 국민들이 이제는 석유파동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송영규 논설위원

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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