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은 이런 여름날 아침이다. 말복을 넘기니 열대야도 한풀 꺾였다며 아침 바람을 따라 뜰에 나섰다. 약간의 시원함이 느껴지니 흔들리는 나무 그늘에서 초록의 움직임을 감지할 여유가 생긴다. 주변은 조용하고 화초는 싱싱하다. 푸른 기운이 눈에서부터 더위를 걷어낸다. 정원의 판판한 자연석 위에 백자 하나가 놓였다. 위아래 반구형을 붙인 도자기 이음새가 불룩하다. 사람이 빚은 백자와 뜰 안의 자연이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조화롭다. 세상 모두를 다 끌어안을 듯한 넉넉함을 가진 백자다. 항아리 표면에서 파르스름한 초록 기운이 도는 것은 이날의 청명한 날씨와 주변의 싱그러운 녹색을 투영했기 때문이다. 백자 발치 끝 돌 주변으로는 하얗고 노란 채송화가 옹기종기 피어있다. 그 위쪽으로는 햇빛 잘 안 들어도 잘 자라는 옥잠화가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백자를 통해 한국적 아름다움을 자신 있게 드러내면서도 자연스럽게 녹여낸 구성이 탁월하다. 설초(雪焦) 이종우(1899~1981)의 1957년작 ‘아침’이다. 신록의 자연 속에 순백의 도자기 하나로 청초한 아름다움을 완성한 수작이다.
이종우는 한국인 화가 최초로 프랑스 파리 유학을 다녀왔고, 본격적인 서양화가로 평생을 살았던 첫 번째 한국 미술가다. ‘아침’은 그가 제6회 국전(國展)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출품한 작품이다. 그림 뒷면에 작가 이름, 제목과 함께 ‘총리공관’이라 적힌 낡은 종이가 붙어있다. 지난 6월 타계한 고(故)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한때 소장했던 이 그림이 김 전 국무총리 재임 시절 총리공관에 걸려 있었음을 증언하는 실마리다. 당시 김종필 총리의 공관에는 이종우의 이 ‘아침’과 더불어 백자 항아리에 소복이 꽃을 꽂은 도상봉의 작품이 함께 걸렸다고 전한다. 김 전 국무총리는 서화 애호가였고 특히 마흔을 넘기고는 직접 그림을 그리며 ‘일요화가회’ 회원들과 시간을 공유하곤 했다. 이 작품은 지난 2016년 케이옥션 여름경매에 시작가 1,500만원으로 출품돼 경합 끝에 2,600만원에 낙찰되면서 개인 소장품이 됐다.
애호가들이 탐내는 그림을 그렸건만 이종우는 일반에게 다소 낯설다. 주입식 교육법을 따라 짚어보자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는 고희동,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는 나혜석이다. 화가로서, 일본을 거쳐 배우는 서양화가 아니라 프랑스 파리에서 직접 보고 배우자 유학을 떠난 첫 번째 사람이 바로 이종우다. 그는 귀국 후에도 꿋꿋하고 꼿꼿하게 서양화가로 살았다. 근대기 국내에 서양화가 본격 도입될 때 그 막을 올렸고 새로운 양식이 뿌리내리기까지 원로 화가이자 교육자로서 살며 한 시대의 막을 내린 이 또한 그였으며, 유일했다. 하지만 개성 강한 화풍의 이중섭이나 독특한 질감의 박수근, 추상미술을 개척한 김환기 등과 비교한다면 이종우의 그림이 ‘덜 자극적’인 것은 사실이다.
이종우는 1899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만석꾼 부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부자였고 돈만 많을 뿐 아니라 교육사업도 펼친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다. 문중에서 세운 조양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그의 미술 재능을 발견한 이는 일본인 도화(그림) 선생이었다. 4학년이던 1915년 조선총독부가 일종의 엑스포 성격의 전람회인 공진회(共進會)를 경복궁에서 열었는데 이종우가 수채화를 출품했다. 조선 말 최고의 화가였던 안중식·조석진·김규진과 서양화가 고희동 등 쟁쟁한 참가자들의 면모와, 160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종우의 자신감이 드높았을 듯하다. 그는 18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관서미술연구소에서 기초 데생을 배운 다음 이듬해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집에서는 그가 법학 공부를 위해 유학 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화가가 환쟁이라 불리던 시절이고, 행세하는 집안에서는 법을 배워 관료될 아들을 선호하던 때였다. 그러니 당시 일본으로 떠난 미술 유학생들이 전공을 법학 등으로 속이는 일은 흔하기도 했다. 이종우가 다닌 동경미술학교 서양화 출신으로 ‘선배’ 고희동이 있다. 하지만 고희동은 귀국 후 서양화가 아닌 동양화가로 활동한다. 뒤이은 김관호는 유학 후 서양화보다 서예에 심취했다. 김찬영은 한국으로 돌아와 고향 평양에 머무르다 서울로 옮기면서 이름을 김덕영으로 바꾸고 그림도 접었다. 대신 ‘102세 현역화가’인 아들 김병기가 더 크게 활약했다. 결국 1세대 일본 유학파 화가 중 끝까지 서양화가로 활동한 이는 4번째 한국인 졸업생 이종우가 처음이었다.
이종우의 성품은 부잣집 도련님 특유의 여유로움과 느긋함이 두드러졌다. 경쟁보다는 즐기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자존심은 강했다.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조선미술전(鮮展)에 출품해 3등상까지 받지만 그 뒤로 다시는 참가하지 않았다. 선전에 동참하는 것이 “일제에 아부하는 것으로 여겨져 치사한 일이거니 했다”고 털어놓았다. 대신 화가는 중앙고보 미술교사로, 고려미술원의 서양화 선생으로 살았다. 그가 격렬하게 빠져든 것은 그림보다 ‘술’이었다. 당시 서울 최고의 요정급 주점이던 ‘명월관’과 ‘식도원’을 들락거렸다. 풍류지향이었을 수도 있으나, 식민지 젊은이가 술로나마 울분을 달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교사 월급 100원이던 시절에 명월관 외상이 800원이나 쌓일 정도로 마셔댔다는 사실이다. 외상은 밀리고 시절은 답답하고 그래도 그림은 그리고 싶었다. “파리로 유학을 떠나자!”
프랑스행을 결심한 그에게 집에서 여비 1,000원에 3개월 생활비로 2,000원을 더해 총 3,000원을 쥐어 주었다. 일단 술값부터 갚았다. 떠나는 그를 위해 명월관에서는 성대한 송별잔치를 열어주었다. 1925년 일본 고베항에서 마르세유행 여객선을 타고 파리에 이르렀다. 꼭 술값 때문에 택한 파리는 아니었다. 일본에서 배운 서양화는 일본식으로 재해석된 인상주의 미술이었다. 이종우는 일본을 통해 만나는 미술이 아닌, ‘진짜’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그가 머무르던 파리에서는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의 모딜리아니, 러시아 출신의 샤갈 등 외국인 이주작가들의 ‘에콜 드 파리’가 활발했다. 개성있는 화가들이 독창적이고 강렬한 화풍을 위해 끊임없이 실험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이종우의 선택은 좀 달랐다. 오히려 기본기를 더 연마했고 사실주의에 입각한 아카데미즘 양식, 그러니까 얌전하고 진지한 화풍에 몰두했다. 러시아 출신의 사실주의 화가 슈하이예프의 화실에서 공부한 영향도 있고, 워낙 일본에서부터 현대적 주제보다는 고전적 사실주의의 가치에 대해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은 탓일 수도 있다. 1927년에는 파리를 대표하는 가을 미술제 ‘살롱 도 톤느(Salon d’Automne)’에 출품했다.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배운성도 함께 참가했고 둘이 나란히 입선으로 한국인 ‘최초’의 영예를 안았다.
그때 이종우가 상 받은 작품이 두 점인데 하나는 외국인 친구의 부인을 그린 ‘모부인의 초상’(연세대 소장)이고 또 하나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인형이 있는 정물’이다. 마침 ‘인형이 있는 정물’은 덕수궁관의 기획전 ‘내가 사랑한 미술관-근대의 걸작’에서 볼 수 있다. 투명한 흰색과 청록색조가 경쾌하고 맑은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유리상자 속 인형을 중심에 놓고 앞쪽에 하얀 그릇에 수련 두 송이를 띄웠다. 그 오른편에는 짙은 녹색 병에 마거리트 세 송이를 꽂아 생동감을 더했다. 뒤쪽 벽면의 타원형 거울에 인형상자의 뒷면 모서리까지 그려넣을 정도로 작가의 손길은 섬세하고 분주했다.
톡톡 튀어 눈길 끄는 것도 좋지만 본질에 충실한 것도 중요한 미덕이다. 끈기 있고 고집스럽게 한 길 걸었던 이종우는 아마도 풍미 강한 음식보다 심심한 평양냉면을 더 좋아하지 않았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