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의 완화된 감독지침 마련은 글로벌 업체와 비교해 규모가 영세한 국내의 제약바이오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주식시장에 상장된 제약바이오 기업이 163개에 이르지만 상당수가 중소기업으로 좁은 내수시장에서 경쟁하는 구조일 뿐 아니라 2016년 기준 국내 의약품 시장은 21조원 규모로 글로벌 시장의 1.7% 수준에 불과한 실정이다. 특히 일부 기업은 안정적인 수익기반이 없어 매출액 저조 또는 영업손실 지속으로 상장폐지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이런 상황에서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제품 출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연구개발(R&D) 비용의 자산화 기준이 분명하지 않고 지나치게 높다 보니 기업들의 불확실성 및 리스크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금융당국이 약품 유형별로 각 개발단계의 특성과 객관적 확률통계 등을 감안해 연구개발비의 자산화가 가능해지는 단계를 설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당국은 이번 지침에 대해 시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새로운 회계기준이나 기준 해석이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가 제시한 기준을 어기지 않을 경우 안 그래도 불확실한 경영 여건 속에서 제재 리스크까지 걱정해야 하는 부담감은 덜어낼 수 있게 된 셈이다. 원가측정의 신뢰성 확보 방안도 기업들의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당국은 프로젝트별 투입 원가를 신뢰성 있게 측정하고 그 중 개발 활동과 직접 관련 있는 원가만 자산으로 계상해야 한다고 명확한 지침을 내렸다. 만약 개발비와 연구비가 혼재돼 구분이 어려운 경우에는 전액 비용으로 인식해야 한다.
지난 4월부터 5개월간 진행한 감리 대상 기업들에 대해 중징계 처분을 내리지 않고 계도 조치 수준에서 일 처리를 마무리하겠다고 밝힌 점도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특수성을 반영한 조치로 보인다. 그간 자산화 처리와 관련해 글로벌 제약기업처럼 정부의 판매허가 시점 이후 지출만을 자산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의견과 대규모 글로벌 기업의 관행을 동일하게 적용하기는 어려워 국내 업계의 특성과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섰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국제회계기준(IFRS)에서 강조하는 원칙중심의 의미에 대한 이해나 적용 부분에서 아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며 “국내 기업들은 오랜 기간 주로 복제약을 생산해왔기 때문에 그에 따른 회계처리 관행이 형성돼 일부 기업들은 최근에 시작한 신약 개발에도 과거와 동일한 회계처리 방법을 관행적으로 적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자산화 처리 과정에서 문제 있는 기업들의 재무제표 재작성으로 영업손실이 증가해 관리종목이 될 수 있는 기업들도 구제해준다. 금융당국은 4·4분기에 코스닥 상장 규정을 개정해 기술성이 있고 연구개발비 비중이 높은 기업에 대한 상장유지요건 특례를 마련해 연내 시행할 계획이다.
국내 바이오업계는 바이오제약기업의 R&D 비용 자산화 논란이 일단락됐다는 점에서 일단 환영한다는 입장이다. 자칫 소모적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사안이었지만 업계 자율성을 최대한 인정하겠다고 밝힌 만큼 K바이오의 경쟁력도 한층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바이오벤처기업 A사의 한 대표는 “R&D 비용에 대한 회계처리 기준이 명확하게 마련되면서 더는 회계처리 논란이 생기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 회계부정 논란 등으로 최근 잔뜩 위축된 바이오제약업에 대한 투자심리도 서서히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제약사 B사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전향적으로 바이오제약산업의 특수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일단 환영한다”면서도“신약·바이오시밀러·제네릭 등으로 회계처리 기준을 차등화하겠다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개발 단계부터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는 바이오제약 산업의 회계처리는 일률적인 기준보다 산업적 특수성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적용돼야 한다”며 “정부가 바이오제약기업의 회계처리 기준을 마련한 만큼 K바이오의 전반적인 경쟁력이 제고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박성규·이지성기자 exculpate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