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의 한 카페. 안에는 크고 작은 화분들, 밖에는 카페 앞 슈퍼마켓 주인이 심어놓은 풀들이 자라고 있다. 종로의 한 카페와 거리, 황태구이집을 배경으로 촬영한 홍상수 감독의 22번째 장편영화에서 그의 뮤즈 김민희는 카페 안팎의 말 없는 식물처럼 조용히 사람들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김민희가 연기한 아름은 하루 종일 카페 구석에 앉아 그가 관찰한 사람들에 대한 단상을 노트북에 기록한다. 작가는 아니지만 마치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 속 화자가 된 것처럼 아름은 사람들의 사연을 추측하고 해석하고 단정짓는다.
이번 영화에선 전작보다 더 많은 인물들이 주인공의 하루를 스친다. 카페에는 죽은 친구에 대한 이야기로 다투는 미나(공민정)와 홍수(안재홍), 모든 것을 잃고 자살까지 기도했던 창수(기주봉), 남는 방에 얹혀살게 해달라는 창수의 부탁에 난처해하는 성화(서영화), 한 달 정도 펜션에 함께 머물며 공동집필을 해보자는 경수(정진영)와 그에게 글은 혼자 쓰는 거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지영(김새벽)이 있고 황태구이집에는 존경하던 한 교수의 죽음이 그의 숨겨진 연인 순영(이유영) 탓이라고 다그치는 재명(김명수)과 그저 “우리는 사랑한 것뿐이에요”라고만 말하는 순영이 있다.
머리 속의 말은 타인의 삶을 넘나들던 아름도 입 밖의 말에선 타인과 거리를 둔다. 단 예외가 있다. 동생 진호(신석호)와 동생의 연인 연주(안선영)를 만났을 때다. “결혼을 하려면 서로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훈수를 두고 연주에게 “진호를 잘 아느냐”고 수도 없이 묻는 아름의 모습에 카페 안 관찰자이자 해석자인 아름의 모습이 겹치며 웃음이 터져나온다.
김민희가 홍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것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그 후’(2017) ‘클레어의 카메라’ 에 이어 이번으로 다섯 번째. 김민희가 홍 감독의 뮤즈가 되면서 홍 감독은 서서히 그의 문법에 변화를 주고 있다. 보통 홍 감독의 동년배 남자배우들을 영화감독, 작가, 출판사 사장 따위로 분하게 해 한국 지식인 남성의 허울을 벗겨냈던 기존의 공식은 점점 희석되고 김민희는 홍 감독의 입과 몸을 대신하는 페르소나가 되어 스크린 밖 세상에 그의 생각을 전한다. 때로는 “서로를 잘 알아야지. 맞는 사람끼리 만나서 결혼을 하는 거야. 그냥 결혼하고 살고, 그래봤자 실패하는 거야. 그게 얼마나 무책임한 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엉망으로 사니. 사랑은 개뿔”이라고 직접적인 설교를 늘어놓아 지질하다 싶지만 결국 홍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아닐까 싶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삶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풀잎들이라는 것, 모두의 사연을 속속들이 아는 듯 우리는 끊임 없이 재단하고 판단하고 훈수를 두지만 결국 세상은 우리의 해석의 테두리 속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 진짜 의도는 ‘우리(홍 감독과 김민희)를 거리의 풀잎처럼 내버려두라는 것’일지도. 결국 두 사람은 16일 언론시사회는 물론 영화가 국내 첫 상영됐던 부산국제영화제에도 두문불출했다. 25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