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사건에 연루된 사우디 정부 인사들의 비자를 취소하는 등 외교적 조치에 나서 ‘카슈끄지 사건’이 중동 외교지형의 주요 변수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피살사건 이후 줄곧 사우디 왕실을 옹호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온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서방국가들과 의회의 압박을 못 이겨 사우디에 대한 강경 입장으로 돌아선 가운데 러시아는 사우디를 적극 두둔하며 서방과 사우디 간에 벌어진 틈새를 파고드는 모양새다.
23일(현지시간) CNBC 등에 따르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이날 국무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는 카슈끄지 사건에 책임 있는 사람들 중 일부를 확인했다”며 “사우디 정보기관, 왕실, 외교부, 다른 부처 등에 있던 사람들이다. 미 정부는 이 21명에 대해 비자 취소 등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어 “미 재무부와 함께 이들에게 ‘국제 마그니츠키 제재’를 적용하는 방안 등을 논의하고 있다”며 “이번 조치가 미국 정부로부터의 마지막 말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미국이 추가 제재에 나설 수 있음을 예고했다. 마그니츠키 제재는 살해, 고문, 인권 학대를 저지른 외국 공직자에 대한 미국 입국 거부, 자산동결 등의 조치다.
지난 2일 카슈끄지 암살 이후 줄곧 사우디 왕실을 옹호해온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정치전문 매체 더힐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카슈끄지의 죽음과 이란의 인권 유린이 “세계의 형편없는 부분”이라며 중동을 싸잡아 비판했다. 트럼프는 특히 사우디 정부를 향해 “그들의 작전계획은 매우 나빴고 그 작전은 형편없이 수행됐다. 이번 은폐는 역사상 최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사우디가 민감하게 생각하는 ‘왕세자 배후론’에 대해서도 “누군가 연루됐다면 왕세자일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앞서 무기수출 중단 결정을 내린 독일 등과 달리 사우디와의 무기계약 거래를 취소할 계획이 없다는 점을 재차 밝혔다.
이처럼 카슈끄지 피살을 계기로 유럽은 물론 오랜 동맹관계였던 미국마저 사우디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러시아는 사우디에 적극 손을 내밀며 중동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나섰다. 러시아 크렘린궁은 이날 카슈끄지 사건과 관련해 “그 사건의 검증된 정보가 있어야 대응할 수 있다”며 “러시아는 왕실이 살해와 관계없다는 사우디의 공식 발표를 인정한다”고 사우디 왕실을 두둔했다.
CNBC는 “외교 다변화 차원에서 러시아 및 중국과의 협력관계를 확충해온 사우디가 이번 외교적 위기를 계기로 더욱 이들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라며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악화를 의식해 침묵을 지키는 선에 그치고 있지만 유럽과 미국의 제재가 본격화할 경우 중국의 불간섭주의는 사우디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같은 외교관계 변화는 25일까지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열리는 미래투자이니셔티브(FII) 행사에도 극명하게 반영됐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스티븐 므누신 미 재무장관을 비롯한 서구 관료들과 JP모건 등 서구 기업의 약 40명이 이 행사에 불참한 가운데 러시아는 대표단을 확대해 존재감을 한껏 드러냈으며 중국 측 참석 인원도 늘어났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사우디 정부가 FII 첫날 맺은 에너지·인프라 관련 500억달러 규모의 계약과 양해각서(MOU)에는 러시아 국부펀드 직접투자펀드(RDIF), 중국 방산업체 노린코 등이 상당액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중동 문제 전문가인 마크 네카츠 조지메이슨대 교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사우디와 서방 관계의 쇠퇴를 활용할 준비가 돼 있다”며 “러시아는 서방과 같은 주요 동맹국으로 대체될 가능성 없이 설사 작은 부분을 차지하더라도 기쁘게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