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잊혀진 의인들-<2> 조명하 의사]단도 하나로 일왕 장인 저격..."저 세상 가서도 독립운동"

조직·배후없이 나홀로 의거


日 거쳐 대만서 혈혈단신 항일운동

구니노미야 노려 달리는 車올라타

일제,우발적·자살 시도로 치부

조명하 의사 존영. /사진제공=조명하의사기념사업회조명하 의사 존영. /사진제공=조명하의사기념사업회




독립기념관에 있는 조명하 의사의 유언비. /사진제공=조명하의사기념사업회독립기념관에 있는 조명하 의사의 유언비. /사진제공=조명하의사기념사업회


그의 삶이 너무나도 평범한 까닭일까. 아니면 의거 장소가 대만이라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라서 그런가. 그도 아니면 일제의 발표처럼 우발적인 것이라 그런 것일까. 서울대공원에 그의 동상이 있건만 우리는 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기억할 때 그의 꿈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의 삶을 꿈꾸던 그의 이름은 조명하다.

대만 의거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사람들이 그의 의거를 성공이라고 인식했다면 여기에 소개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를 떠나 그가 행한 의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의거에 사용한 도구는 흔히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저격용 라이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홍콩 누아르에서 주인공이 쏘면 다 맞는 그런 권총도 아니었다. 단지 작은 칼이었다. 어쩌면 홀로 의거에 나서야 했기에 그 단도 하나만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의거를 위해 단도를 사용할 수 있는 거리까지 더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은 명확했다. 그 역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성공과 실패는 분명하지 않지만 가까이 갈수록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가 작은 칼 하나를 가슴에 품고 의거를 위해 걷던 길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금은 알 도리가 없다. 일제는 심문 기록에서 그가 생을 마감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여러 연구에서 그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다. 홀로 길을 나서며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의 결심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언제든 돌아설 수 있었다. 설사 도착했다 해도 그가 칼을 빼 들지 아니했다면 군중에 섞여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설령 그가 손에 칼을 들었다 해도 그 달리는 차를 향해 뛰어 나가지 않았다면 군중 틈에 섞여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리했다면 어쩌면 그는 일제의 패망과 해방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그만둘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있었고 마지막에 돌아서도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의 아내는 타지에서 주변의 수많은 중국인을 놓아두고 하필 당신이었는가 원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젊은 그의 삶 속에는 미래에 대한 꿈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가 의거 장소로 걸어가며 내쉬었던 날숨에도 삶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을 것이다. 고향에 두고 온 부인과 아직 어린 자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 돌아서라, 그만두어라 유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서울대공원에 있는 조명하 의사 동상. /사진제공=조명하의사기념사업회서울대공원에 있는 조명하 의사 동상. /사진제공=조명하의사기념사업회


일제의 대륙침략에도 경종


의거 직전 대규모 산둥출병 앞둔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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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암살 시도에 결국 침략 미뤄

中도 내부갈등 다스리고 단일대오

일제는 그의 의거를 우발적이라 결론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의거는 성공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그는 달리는 자동차에 올라타야 했고, 예리하다 표현했지만 눈에 띄지 않게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짧은 칼만을 준비했을 뿐이었다. 목표 달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기에 우발적이라 본 것이다.

나름 자동차의 달리는 속도를 고려해 커브에서 자동차가 느려지는 순간을 노렸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가 실행에 옮긴 장소는 차량이 커브를 지나 다시 속도를 내는 구간이었다. 심지어 호위 차량이 앞뒤로 줄지어 있었고 길가에는 수많은 일본 경찰과 군인들이 경호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경호를 뚫고 직진 도로에 접어들어 다시 속도를 내는 차에 올라타 의거를 하려 했으니 그들이 봤을 때는 무모해 보였을 것이다.

삶에 대한 의지를 뜻을 이루기 위해 미뤄둔 것과 살기 싫어 그 방법을 찾는 것은 결과는 같을지언정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뜻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아니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그들로서는 후자가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심문 결과에서 그가 자살하려 했다고 결과를 후자에 연결하고자 했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로서는 그의 행적을 살펴봐도 별다른 특이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후자로 판단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의 의거는 일본군이 입장을 정리해 보고해야 할 정도로 위중한 사건이었다. 일제는 그의 배후를 찾고 싶었다. 아마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배후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배후가 있어 그에게 사주했고 그는 그런 배후의 암살자였다고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 내 정치 파벌 간의 갈등이 표출된 결과 누군가 그에게 사주한 것은 아니었을까 의심도 했다. 왜냐하면 그의 의거로 목숨을 잃을 뻔한 구니노미야 구니히코는 일본의 육군 원수이자 두 번이나 총리를 지낸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영향력을 상실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에게서 배후를 찾을 수 없었다. 겨우 찾아낸 것이 그와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그의 고향 친구였다. 그렇기에 일제는 그가 자살이 목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미 삶을 비관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수차례 자살을 기도했고, 심지어 심문 도중에도 자살을 시도했던 것이 근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식민통치의 실상에 대한 자백과 다름없었다. 애초부터 일제가 주장한 그의 삶에 대한 비관은 식민통치의 결과였다.

일제는 식민통치를 위해 다양한 수식어를 붙였지만 결국 식민지배하에서는 교육을 받아도 마찬가지였고 한국과 일본 심지어 대만으로 자리를 옮겨도 차별은 마찬가지였다. 판결문에서 보여준 그의 여정은 일제가 저지른 침략과 폭압적인 식민지배의 현실이었다. 판결문은 그가 일제에 그 책임을 묻고자 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침략의 선봉에 있던 일본군의 육군 대장이자 일제를 상징하는 일왕의 장인인 구니노미야에게 책임을 묻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당시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 그의 의거가 어떤 파급을 일으킬지 몰랐다. 그의 의거 직전이던 5월3일 일제는 ‘제남 사건’을 빌미로 재차 산둥에 일본군 파병을 결정했다. 5월8일에는 병력 증원을 위해 1사단에 동원을 지시했고 5월9일에는 3사단의 파병을 명령했다. 전쟁이 확대될 경우 일본 전체가 동원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본군을 사열하기 위해 대만에 도착한 왕족이 식민지 청년에게 죽을 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의거가 가진 의미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일본 국내뿐 아니라 국제사회 역시 산둥 출병에 비판적이었다. 장제스의 북벌을 틈타 중국 대륙을 침략하려는 일제의 의도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이런 소식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과 대만에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평범한 식민지 청년의 왕족 암살 시도는 자칫 일본군 파병을 반대하는 여론의 상징처럼 비칠 수 있었다.

그는 1905년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나 인근 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졸업 이후에 일자리도 구했고 결혼해 자녀까지 두었다.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 평범해 보이는 삶 속에서 그가 경험한 일제의 식민지배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고 그 이후는 무단정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송화군에서도 치열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 역시 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제의 강압적인 탄압과 이후 문화정치라는 미명 아래 이뤄진 억압과 차별뿐이었다.

그런 차별 속에서도 그는 삶에 대한 의지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고 대만까지 왔다. 하지만 결국 남아 있는 것은 식민지배의 실상이었고 다시 침략전쟁을 준비하는 일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의거를 통해 알리고자 했던 대상은 어찌 보면 한국 이전에 중국이었을지 모른다. 중국 침략을 위해 전쟁 준비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일제 앞에서 내부적 갈등에 얽매여 있는 중국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과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일제는 장쭤린까지 폭살시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의거 직후 중국은 내전으로 치닫기보다 장제스의 국민당을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고 대응했다. 결국 일제는 대륙 침략전쟁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의거는 처음부터 일본 왕족 한 명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의 의거는 결국 성공한 것은 아닐까.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심문 과정에서 그가 자살을 시도하기 위해 모르핀과 종이를 함께 삼켰다고 한다. 심문 중에 모르핀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군대에서는 전투 중 입은 심각한 부상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하려고 모르핀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만큼 모르핀에 의한 환각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의지를 꺾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런 모르핀이 그의 심문 장소에 왜 있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일제가 그에게 가한 심문이 어떠하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신효승 동북아역사연구재단 연구위원신효승 동북아역사연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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