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해외칼럼] 역사의 교훈… 스스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1차 대전 직전 1914년처럼

지구촌 성장·기술혁신에도

국가주의 등 곳곳 위기 징후

현실 극복 노력할때 아닌지...

파리드 자카리아파리드 자카리아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CNN ‘GPS’ 호스트

요즈음 나쁜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문제에 부딪힐 때면 “도덕적 우주의 둥근 궤는 길지만 정의를 향해 굽어지는 속성을 보인다”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

하지만 부분적인 뒷걸음질에도 불구하고 전향적인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는 가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일요일인 11월11일,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11월11일 11시, 우리는 세계 최대 유혈충돌의 종식 100주년을 기념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방대한 4개 제국의 몰락과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발흥, 미국의 글로벌 정치판 입성 등 인류사의 전환점을 찍었다.

그러나 아마도 제1차 세계대전의 가장 중요한 지적 유산은 불가피한 전진이라는 아이디어가 종말을 맞은 것일 터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인 1914년 당시의 지구촌 주민들은 지금의 우리처럼 활기찬 경제성장과 기술혁신 및 확대일로의 세계화 등으로 규정된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설사 보기 흉한 추세선이 나타난다 해도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현상일 뿐 진보를 향한 전향적인 전진에 곧바로 압도될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확산됐다.

1909년 노먼 에인절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주요 대국들 사이의 전쟁은 천문학적인 비용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들 간의 충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대환상(Tne Great Illusion)’이라는 제목을 지닌 그의 책은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됐고 에인절은 숱한 추종자를 거느린 유명인사의 반열에 올랐으며 결국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했다.

대환상이 발간된 지 불과 몇 년 안 돼 유럽의 한 세대가 전쟁의 참화로 온전히 파괴됐다.

당시 그랬듯 지금의 우리 역시 지나치게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럴 것이라 믿는 진중한 정치인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최근 인터뷰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두려움과 국가주의 및 경제위기의 결과로 분열된 작금의 유럽에서 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29년의 경제위기에 이르는 기간 유럽인들의 삶을 지배했던 거의 모든 것들이 계통을 밟아가며 질서정연하게 되풀이되고 있음을 본다”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이에 앞서 올해 초 유럽의회 연설에서 마크롱은 “나는 자신의 과거를 망각한 몽유병 환자들의 세대에 속하고 싶지 않다”고 강조했다.

역사가인 크리스토퍼 클라크가 그의 저서 ‘몽유병자들(The Sleepwalkers)’에서 지적했듯, 1914년 유력 정치인들은 그들의 고립적이고 점증적인 결정, 혹은 무의사(non-decisions)가 초래할 위험의 규모조차 깨닫지 못한 채 소름끼치는 전쟁에 휘말렸다.

마크롱은 단지 말만 앞세운 것이 아니다. 그는 파고를 높이는 민족주의와 축소되고 있는 지구촌의 협력에 따른 위험에 맞서기 위해 일요일인 11일 60여명의 세계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파리 평화포럼을 준비했다.

이런 위험은 정말 긴급한 현안일까.

오늘날의 세계는 1920년대보다 1930년대와 유사하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경제성장과 기술적 진보가 축적되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1920년대의 특징이었던 민족주의의 발흥과 협력의 와해를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신흥 강국들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또한 무솔리니가 진보적 기관들을 폐쇄하고 권력을 장악했던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선동적인 정치인들에 의해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의 가운데에 부쩍 성장한 대중주의,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들은 국가들을 분열시키고 “진정한 국가”의 외양인 다양한 소수계들을 배제하는 데 이용됐다.

물론 1920년대의 압박으로 우리는 1930년대를 갖게 됐다.

오늘날의 트렌드는 모두 연결돼 있다. 경제성장, 세계화와 기술은 국가들 사이에, 혹은 세계 전체에 새로운 힘의 중심을 만들어냈다.

지금은 대박을 친 승자들과 쪽박을 찬 패자들이 공존하는 시기다. 눈부신 변화의 속도는 전 세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국가와 문명 역시 빠르게 변화하는 중이라는 조바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변화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겠노라 약속하는 독재자들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역사가인 티머시 스나이더는 그의 새로운 저서 ‘부자유로 가는 길(The Road to Umfreedom)’에서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낙천적 신앙인 “불가피성의 정치학”과 “영원의 정치학”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했다.

후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들이 갖는 견해로 불가피한 것은 없으며 무력과 교활함, 힘과 의지를 통해 역사가 그리는 궤를 구부리거나 심지어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다.

스나이더는 푸틴이 서구와 손잡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거부한 채 일련의 가차 없는 조치로 우크라이나를 끝없는 내분 속으로 몰아넣어 어떻게 해체시켰는지 설명해준다.

푸틴은 이기지 못할지 모른다. 과거의 진보를 되돌리려는 그와 같은 사람들의 노력은 승리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다른 편에 선 사람들의 더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저 지켜보기만 해서는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역사는 할리우드 영화가 아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