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영리병원인 녹지국제병원이 외국인 전용 병원으로 내년 초 제주도에 문을 연다. 조건부 허가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영리병원이 들어서면서 제주도의 관광산업 경쟁력이 강화되고 국내 헬스케어 산업의 글로벌 진출도 속도를 낼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다만 시민단체가 의료민영화를 위한 수순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개원을 둘러싼 진통은 당분간 불가피할 전망이다.
5일 제주도는 서귀포시 토평동 제주헬스케어타운에 위치한 녹지국제병원을 외국인 전용 영리병원으로 조건부 허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지난해 7월 준공된 녹지국제병원은 이르면 내년 1월 개원해 본격적으로 외국인 환자 유치에 나설 예정이다.
윈희룡 제주도지사는 “녹지국제병원 허가는 관광객 감소로 기로에 놓인 제주의 미래를 위해 고심 끝에 내린 불가피한 선택인 만큼 제주도민들의 양해를 부탁드린다”며 “철저한 관리감독을 통해 영리병원 도입의 취지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제주헬스케어타운 부지에 2만8163㎡(약 8,500평) 규모로 들어서는 녹지국제병원은 중국 부동산 개발기업 뤼디(綠地)그룹이 투자한 영리병원이다. 47개 병상에 성형외과, 피부과, 내과, 가정의학과 4개 진료과로 운영된다. 뤼디그룹은 자본금 210억원을 비롯해 총 778억원을 녹지국제병원에 투자했으며 현재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인력 134명을 채용한 상태다.
제주도에 영리병원을 설립할 수 있는 법령은 지난 2006년 마련됐지만 올 들어서도 계속 논란을 거듭해왔다. 지난 10월에는 제주도민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출범한 ‘숙의형 공론조사위원회’가 녹지국제병원 승인을 불허한다고 결정하면서 최대 고비를 맞았다. 위원회는 영리병원이 도입되면 의료 서비스의 공공성 악화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제주도가 도민들의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영리병원을 허가한 것은 불허에 따른 유무형의 손실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주도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갈수록 감소하는 상황에서 영리병원 개원은 당장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영리병원이 성공적으로 자리잡으면 반대 여론도 수그러들어 제주도를 의료와 관광을 연계한 글로벌 의료관광의 메카로 육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사드 사태’ 이후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중국과의 관계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법적으로 허가를 내주지 않을 명분이 없는 상황에서 불허를 결정했다가 자칫 중국인 관광객 감소라는 역풍을 맞을 수 있어서다. 앞서 뤼디그룹은 녹지국제병원의 개원이 가로막히면 1,000억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의료계는 건강보험과 의료수가에 제한을 받지 않는 영리병원이 문을 열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떠오른 국내 헬스케어 산업의 경쟁력도 덩달아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영리병원의 특성상 진료비 책정이 자유로운 탓에 첨단 의료기기와 정보통신(IT) 기술을 접목한 의료 서비스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술력을 확보했지만 각종 규제에 막혀 글로벌 진출에 애로를 겪는 바이오벤처기업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전망이다.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영리병원이 외국인 환자 30만명을 유치했을 때 생산유발 효과는 최대 4조8,00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제주도민과 시민단체의 반발이 거세게 이어지면서 녹지국제병원을 둘러싼 논란은 개원 후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이날 제주지역 30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의료영리화 저지와 의료공공성 강화를 위한 제주도민운동본부’는 성명서를 내고 “도민을 배신하고 중국 자본을 선택한 원희룡 지사는 즉각 퇴진하라”고 촉구했다.
김준현 건강세상네트워크 대표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조건부 허가라지만 일단 영리병원이 도입되면 결국 의료민영화로 가기 위한 수순이 될 수밖에 없다”며 “제주도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투자자와의 신뢰성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은 민주주의 절차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