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천상의 박완서, 지상으로 초대

타계 8주기 맞아 후배작가 29명

해학적 문체의 작가정신 오마주

'멜랑콜리 해피엔딩' 소설집 출간

'1970년대 풍자' 박완서 첫 콩트집

'나의 아름다운 이웃' 개정판도 나와




#“자네 행여 아들들 연애결혼 시키지 말게. 딸은 시켜도 괜찮지만. 나도 큰애를 저희가 좋다는 대로 큰소리 한마디 안 하고 짝 지워준 게 지금 와서 슬그머니 심통이 날 지경이라니까. 아들 가진 쪽에선 중매결혼 그거 참 할 만한 거더라고. 그게 말야, 꼭 돈을 핸드백에 잔뜩 넣고 백화점으로 물건 고르러 다니는 것만큼이나 신이 난다니까. 자네도 알지? 돈 없이 물건 쳐다 볼 때 온통 갖고 싶은 거 천지다가도 가진 돈이 두둑하면 별안간 안목이 높아지면서 거드름을 피우고 싶어지는 거 말야.”(‘나의 아름다운 이웃’ 중 ‘어떤 청혼’의 25~26쪽)

#“나는 가슴이 뛰었다. 나는 어쩌면 낭만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감미롭되 부도덕하지 않은 낭만을.”(‘나의 아름다운 이웃’ 중 ‘마른 꽃잎의 추억1’의 42쪽)


박완서의 문체는 이처럼 아줌마의 거침없는 입담을 닮았다. 그래서 박완서 소설의 미덕이 인간의 속물근성과 금지된 욕망, 비틀린 세태를 예리하게 통찰하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드러내는데 있다고들 평가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키득키득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속으로는 뜨끔한 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속물 심리를 전적으로 부정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딱 떼어 버리기도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인데, 속물근성은 어쩌면 우리 안에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욕망의 외피다. 숨겨둔 욕망의 민낯이 박 작가의 글을 통해 드러나니 우리의 얼굴이 화끈 거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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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 타계 8주기를 맞아 후배작가 최수철·함정임·조경란·백민석·이기호·백가흠·조남주 등 29명의 작가가 박완서를 오마주한 짧은 소설집 ‘멜랑콜리 해피엔딩’과 작가가 처음으로 펴낸 짧은 소설집(콩트집) ‘나의 아름다운 이웃’(개정판)을 작가정신이 펴냈다.



‘멜랑콜리 해피엔딩’은 후배소설가 29명이 들려주는 짧은 소설들을 묶은 박완서에 대한 찬사다. 그러나 ‘멜랑콜리 해피엔딩’에는 박완서 작가를 직접 언급하지 않은 소설들이 대부분이다. 우선 최철수 작가의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자의 죽음’은 속도만능주의 속의 인간군상을 해학적으로 그려 박완서를 오마주했다.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구평모라는 인물에 대한 주변인들의 평가를 청취하면서 진행되는 이 작품은 게으름이 단순히 나태와 무기력의 상징이 아닌 인간성을 지키고 나답게 살기 위한 적극적인 의지로 해석해 밀레니얼 세대에게 깊은 공감을 선사한다. 또 조남주 작가는 ‘어떤 전형’을 통해 대입 원서 마감을 앞두고 종교 전형으로 지원하기 위해 크리스천이 됐다가, 불교 신자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촌극을 보여줌으로써 콩트의 재미를 살렸다. 황정임 작가는 ‘그 겨울의 사흘 동안’에서 고인을 적극적으로 언급해 박 작가를 기렸다. 함 작가는 과거 편집자로 일할 당시 계간지에 박완서의 장편소설 연재를 맡거나 작품 세계를 망라하는 특집호를 기사를 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를 향한 각별한 애정을 고백한다. “작가와 편집자라기보다는, 시집 간 딸과 딸을 갸륵하게 바라보는 친정 엄마의 모습과 같았다”라는 회고에서는 박완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작가의 첫 콩트집 ‘나의 아름다운 이웃’은 1970년대 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담아내며 평범한 삶 속에 숨어있는 ‘기막힌 인생의 낌새들’을 절묘하게 포착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박완서는 ‘나의 아름다운 이웃’의 책 머리에 콩트 쓰는 맛을 방 안에 들어앉아 창호지에 바늘구멍을 내고 바깥세상을 엿보는 재미에 비유했는데, 그가 바라봤던 1970년대의 모습은 이렇다. 아파트 건설(‘아파트 부부’ 등) 등 개발 열풍이 불며 금전만능주의가 팽배하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 인간관계 또한 순수성을 잃어 갔으며, 당연했던 노부모 부양(‘이민 가는 맷돌’ 등)은 점점 선택이 돼가는 등 가치관이 흔들렸다. 작가는 책에서 보통 사람들의 인생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사랑과 결혼(‘궁합’, ‘거울 속 연인들’) 그리고 성공의 기준(‘성공 물려줘’)이 무엇인지를 소소한 해프닝으로 그려냈는데, 2019년을 사는 우리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박완서의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연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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